닷새 아닌 보름·열흘마다 열린 장도

▲ 진도 임회면 십일시 장터. 이 장은 진도읍에서 팽목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오늘날 장은 ‘오일장’으로 불린다. 장이 열리는 주기가 5일, 곧 닷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전국 1000여 군데의 장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1일과 6일, 2일과 7일, 3일과 8일, 4일과 9일, 5일과 10일처럼 닷새마다 서는 장이 각각 200여 군데로 오일장이 일반화됐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초기의 장은 닷새마다 열리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성종3년(1472) 7월27일자 기록에 따르면, 처음엔 한 달에 두 차례, 즉 보름마다 장이 섰다. 흥미롭게도 20세기 초엽까지 전라도에는 초기의 장처럼 보름마다 열리는 장이 있었다. 해남군 장서면의 개초장이 그것이다. 장서면은 1914년 장목면과 합해 지금은 화원면으로 바뀐 곳으로 개초장은 화원면 장춘리 장평마을 일대서 열렸다.
 
다른 장 개시일과 겹치지 않게
 
 물론 이처럼 초기에 보름마다 열리던 장은 18세기쯤에 이르면 대부분 오일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10일에 한 번씩 열리는 열흘장도 적지 않았다. 18세기 말엽 해남군에서 열렸던 4개의 장, 즉 오늘날 삼산면에 해당하는 녹산면의 용암장, 지금의 현산면에 해당하는 은소면의 용당장, 현재 마산면에 속하는 산일면의 고암장, 그리고 화산면의 선창장은 모두 열흘마다 열리는 장이었다(이 무렵엔 아직 개초장이 문헌에 보이지 않아 개초장은 그 뒤에 생긴 듯하다). 그 뒤인 20세기 초엽까지도 해남에선 열흘장의 전통이 계속돼 옥천면의 이일장(二日場), 북평면의 좌일장, 마산면의 칠일장(七日場), 송지면의 송지장은 모두 10일에 한 번씩만 장이 섰다. 이일장이니 칠일장이니 하는 장은 아예 장이 서는 날짜를 장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이기도 했다.

 진도군의 경우엔 이런 전통이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됐다. 고군면에는 오일시(五日市)라 부르는 장이 있는데 장날이 5일로 끝나는 날, 즉 5일과 15일, 25일에만 장이 섰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 같은 군 임회면에는 십일시(十日市)란 장도 있는데 역시 날짜의 끝수가 10일 때 열리는 장이었다.

 이들 장은 오늘날엔 예전처럼 5일이나 10일이 끝수인 날에만 열리지는 않는다. 오일시는 1일과 5일에, 십일시는 4일과 10일에 장이 열린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장이 열리는 주기가 꼭 5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오일시의 경우, 한번은 4일 간격, 다른 한번은 6일 간격으로 장이 선다. 십일시의 경우에도 한번은 5일 간격, 다른 한 번은 4일 간격으로 열리므로 엄밀하게 장이 서는 주기로만 따진다면 오일장이 아닌 셈이다. 이처럼 특이한 장날을 가진 것은 본래 열흘장이던 오일시나 십일시가 다른 장들처럼 닷새마다 열리는 장으로 바꾸려 했을 때 이미 그들이 원하는 장날이 다른 장의 개시일(開市日)과 겹쳐 이를 피하고자 한데서 생긴 일이다.

 이처럼 장이 열리는 패턴은 광주장의 역사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광주에 장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앞서 인용한 ‘조선왕조실록’ 성종3년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무안 등 여러 고을에서 장사꾼들이 ‘장문(場門)’이라 일컫는 장에 모여든다”고 한 구절이 있어 이 무렵엔 광주에도 장이 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곧이어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매월 두 차례 장이 선다”는 내용이 잇따른 것을 보면 광주에서도 처음엔 열흘마다 장이 섰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는 광주 장날, 즉 2일과 7일에 열리던 큰 장날과 4일과 9일에 열리는 작은 장날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광주장이 큰 장과 작은 장이 분화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언제일까?
 
전라도 고을 매월 두 차례 장이 섰다
 
 지난 번 필자는 광주장이 처음엔 광주읍성 북문 밖인 지금의 충장로4가,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장터마을이란 의미로 시리(市里)라 불렀던 동네에서 열렸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임진왜란 전에 이미 장이 열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6세기 사람인 이순인((李純仁)은 광주 희경루에 올라 이런 시를 지었다. “멀리 푸릇한 산봉우리 한 눈에 들어오고 / 찔레꽃은 만발하여 시름을 덜어주는데 / 아침에 누각 올라 머리카락 세어진 것 깨달았고 / 새벽엔 조정에서 일하던 시절 꿈까지 꿨다네 / 옛 장터엔 어느덧 인적 끊기고 산엔 황혼 깃드니 / 멀리 마을에서 연기 일고 하늘은 어둑어둑 / 술꾼들도 흩어져 적막하기만 한데 / 어찌 나 홀로 이 길을 가야할까”

 일반적으로 희경루는 예전 충장로2가의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인은 이 누각에 올라 충장로 일대를 굽어보며 이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옛 장터’란 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이순인이 광주에 왔을 즈음엔 이미 북문 밖에서 장이 서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순인이 정확히 언제 광주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그 해에 작고한 것을 보면 광주장은 그 이전에 이미 북문 밖에서 새로운 자리, 즉 광주천변으로 옮겨 열렸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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