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오일장, 광산구 신장

▲ 광주 동곡동 호가정. 이 정자가 속한 동네에 과거 신장이란 오일장이 열렸다.
 광주의 장을 얘기하면 으레 규모가 큰 장을 말하기 쉽다. 지금의 양동시장의 전신이 된 광주 큰 장이나 송정역이 생기면서 등장한 송정장 같은 곳이다. 혹은 이들 장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지금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비아장 같은 곳을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광주에는 기억 속에서도 존중받지 못한 채 사라진 장들이 많다. 그들 가운데 ‘신장’이란 곳도 있다.

 송정시내를 거쳐 나주 방면으로 가려는 사람은 대부분 국도13호선을 이용한다. 이 도로는 중간, 즉 광산구 동곡동과 나주 노안면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를 넘어간다. 지금 송산동과 나주혁신도시를 잇는 국지도 49호선과 만나는 본덕교차로 일대다.

 그런데 차를 타고 거침없이 이곳을 넘는 사람들에게 이 구릉지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 구릉지 끝자락에 있는 호가정(浩歌亭)을 들르거나 4대강 사업으로 생겨난 승촌보(昇村洑) 입구를 찾아가기 위해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구릉지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별로 없다. 구릉지는 단조롭고 붉은 밭과 약간의 수목들이 듬성듬성 언덕을 뒤덮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차창 앞을 가득 메운 먼발치의 나주 금성산이나 차창 왼쪽의 무등산에 이끌린 눈은 정작 자신이 한참 달리고 있는 이 구릉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다. “속도가 풍경을 잊게 만든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구릉지 넘는 감회, 시로 남아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1487년 겨울, 전라관찰사 김종직은 나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갔다. 이 일대는 지금처럼 동곡동이나 평동이라 불리기 전에 ‘복룡현’이라 불렸다. 지금도 평동공단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을 일러 복룡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하튼 이때의 감회를 김종직은 ‘복룡을 지나며’라는 시를 지어 남겼다.

 ‘가마 소리 삐걱삐걱, 맑은 개울을 건너는데 / 멀리 길라잡이는 비탈진 밭 사이를 뛰어가네 / 시골 개는 울타리 사이로 머리 내밀고 짖어대고 / 길엔 무당이 귀신을 맞으려 돈처럼 오려 만든 종이들이 걸려 있네 / 문뜩 구름 사이로 차가운 햇살이 비쳐오는데 / 낮고 작은 언덕들은 한없이 이어져 있기만 하네 / 여기서 나주까지는 30여 리 / 가마꾼의 어깨가 벌겋게 벗겨질까 봐 걱정이네’

 그로부터 400여년 뒤인 1896년 가을에 지도군수 오횡묵은 이제 나주에서 광주로 오는 도중에 이 구릉지를 넘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이곳을 넘는 감회를 이런 시를 지어 표현했다.

 ‘가을날의 금성(錦城, 나주의 별칭)은 비단보다 더 아름답고 / 한없이 너른 들은 서리 내린 뒤라 더욱 맑네 / 오곡(五穀)은 백리 들판에 가득하고 / 수 천 호의 민가들은 끝이 없구나 / 멀리 조각구름들은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데 / 말머리처럼 우뚝한 산들은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네 / 아득하기만 한 이곳에서 나는 바다 속의 좁쌀 같은 존재 / 잠시 가마를 세우고 너른 돌 위에 옷을 풀어헤치네’

 필자가 번역에 소질이 없어 그렇지 아마도 한자 원문으로 읽으면 더 운치 있는 시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시에 어디에도 이곳에 장이 열렸다는 언급이 없다. 아마도 김종직이 이곳을 넘던 1487년엔 아직 장이 생기기 전이었고, 오횡묵이 이곳을 통과할 때인 1896년엔 이미 장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곳에 장이 있었음을 확신하는 건 1770년에 펴낸 ‘동국문헌비고’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엔 매번 4일과 10일이면 장이 열렸고 그 장을 일러 ‘신장(新場)’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신장에 대해 기록한 것은 이것이 전부다. 사실 신장의 위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주막의 흔적으로 남은 장의 역사

 그런데도 필자는 왜 이곳에 장이 있었다고 우기는 것일까?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의 주막 중 하나로 신원(新院)을 언급하며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1897년에 펴낸 나주읍지엔 신원과 관련해 이런 설명을 한다. ‘훈련장은 나주 동쪽 5리쯤, 영산강 건너편 남평 땅과의 경계에 있다. 광활함에 있어 이곳과 비교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매번 군사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영산강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래서 나주목사 이우규가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훈련장을 나주 복암면 신원등(新院嶝)으로 옮겨 다리를 놓는 수고로움을 없앴다.’

 복암면은 지금의 나주 노안면을 말한다. 그리고 이곳에 신원이란 주막이 있어 그 언덕을 통틀어 ‘신원등’이라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신원등’이라 불리는 구릉지 어디에 장이 열렸는가는 의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장이 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은 땅 이름으로 남아 있다. 호가정 아래 골짜기는 지금도 ‘장밑에’로 불린다. 이 언덕에 장이 섰으므로 그 아래 골짜기는 ‘장 밑에’가 됐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신장은 신원이란 주막을 배경으로 대략 300여 년 간 운영됐던 것 같다. 그리고 장은 오횡묵이 이곳을 지날 때쯤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래도 한때 장이 설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붐볐던 탓일까? 오횡묵은 1896년 9월 11일, 이곳 신원등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곳은 그때까지도 이곳에는 주막들이 운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10년대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엔 그때까지도 ‘신원점’과 ‘광주출입점’이란 주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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