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경외 의미서 비하의 말로 변천

▲ 1910년대 광주 큰 장.
 시장이나 저자를 뜻하는 한자 시(市)를 보고 있노라면 필자는 뭔가 깃발을 세워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굳이 깃발이 아니더라도 큰 나무나 그에 버금가는 상징물이 있어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였을 것이고 여기서 착안해 만든 한자가 市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잘못된 전제가 낳은 잘못된 결과이기도 했다. 누군가 깃발을 꼽아 놓거나 큰 나무를 심어놓았으니 사람들이 모였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그처럼 인위적인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을까?
 
큰 나무 심었으니 사람들 모일까

 더구나 이런 상상은 이 한자가 생겨난 과정을 알면서 더 엉뚱한 것이 됐다. 원래 시장을 뜻하는 한자는 조금 복잡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한쪽에는 발바닥을 형상화한 지(止)가 있고 그 옆엔 고함을 지른다는 뜻의 혜(兮)를 붙여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 서로 물건을 가지고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미는 단순한데 이를 표현하는 한자가 복잡해 훗날 시장의 실용적인 분위기에 맞게 한자를 간략화한 것이 다섯 획만 그으면 되는 市 자라 됐다고 한다(참고로 네 번의 획만으로 글자를 완성하면 ‘초목이 무성하다’는 뜻의 불자가 된다).

 여하튼 시장은 시끄럽다. 부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고, 그래야 시장 맛이 난다. ‘시장판’같아야 시장다운 것이다.

 한 자리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 예전엔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 18세기에 광주 인구는 3만 명이었다. 워낙 인구수를 속이는 게 관행이라 - 그래야 식구 수를 줄여 신고해야 세금이나 부역으로 인한 고통을 덜 받을 수 있으므로 -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실제 인구도 3만 이쪽저쪽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광주 땅 면적은 지금보다 100평방킬로미터쯤 적은 400평방킬로미터였으므로 킬로미터당 75명이 사는 꼴이었다. 인구밀도가 엄청나게 낮은 것은 아니지만 (전남의 22개 시군 가운데서 인구가 가장 적다는 요즘의 구례군와 비슷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광주의 인구밀도가 2700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분명 성근 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 모이는 것만으로도 볼거리

 그렇다 보니 수백 명이 모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런 당시에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주기적으로 모이는 경우는 장날이 아니고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장날은 단순한 상거래 장소 이상이었고 어쩌면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까지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는 성스러움을 간직한 공간이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실례는 아주 전부터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시(神市)가 하잘 데 없는 저잣거리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담긴 ‘시’라는 글자는 분명 성스러움과 경외감을 함께 나타내는 장소를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시정잡배(市井雜輩)’처럼 ‘시’는 비하의 말이 됐다. 시정(市井)이 왜 하필 우물과 뒤섞여 한 단어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우물가는 물이 풍족한 곳에서도 사람들의 오아시스였던 법이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요즘은 ‘모정’이란 말에 밀려났지만 동각, 유산각을 일컬어 ‘시정’이라 부르는 동네도 많았다. 택지로 개발되기 직전인 1990년대 초엽 북구 일곡동엔 이런 시정이 있는 언덕이라 하여 ‘시정등’이라 부르던 곳이 있었다. 지금 일곡경찰지구대가 있는 언저리였다. 여기서 시정은 농민들이 생뚱맞게 음풍농월이라 하자고 지은 건물, 즉 시정(詩亭)이 아니었다. 동네 밖 거리에 나가는 입구에 있는 정자 모양의 건물이란 뜻으로 시정(市亭)이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시정등에서 몇 백미터만 나가면 외출교(外出橋)라는 다리가 있었고 이 다리는 일곡동의 진짜 출입구였다. 이처럼 ‘市’는 동네 밖, 다소 폐쇄적인 경계선에서 이웃과 만나는 접점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하의 말로 쓰이던 글자, ‘시’

 세상엔 기록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많은 것들이 있다. 가끔 필자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조선시대에 광주사람들이, 아니 조선의 모든 고을이나 그곳 사람들이 우리는 한 동네 사람들이란 마음을 수시로 재확인해 주는 공간은 어디고 어떤 때였을까?

 요즘 광주 사람들은 금남로에 나가면 광주 공동체의식을 가진다고 한다. 4·19때 그랬고 5·18때 그랬으며 1987년 6월에도 그랬고 지난 해 촛불집회 때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촛불집회 같은 건 없었다. 초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엔 금남로도 없었다. 그렇다면 매일 지역뉴스를 듣고 지역의 이슈를 공유하는 기회도 드물었던 시절에 무엇으로 사람들은 광주사람이란 소속감을 나눴을까? 어디에도 그것이 장터이거나 장날이라고 기록한 것은 없다. 하지만 장터나 장날 말고 다른 것이 필자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과연 이번에도 잘못된 전제로 시작된 잘못된 상상일까?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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