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사랑한 시인 프랑시스 잠

▲ 프랑시스 잠, 윤동주100년포럼 옮김, ‘프랑시스 잠·시집’, 스타북스, 2017.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우선 제목부터 알맞지 않다. 잠은 이 시에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진실로 소중한 일은 큰 건물을 올리고 우주선을 만드는, 그런 엄청나고 거대한 일이 아니라 작고 소박하지만, 내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이, 또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누리며 하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소중한 일이라고 노래한다. 다시 말해 잠은 이 시에서 ‘사람이 하는 위대한 일’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진정으로 소중한 일’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영역에서도 보통 ‘The Truly Great Works of Man’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진실로 소중한 일은……(Ce sont les Travaux……)’으로 옮기고 싶다.

시 본문도 자연스럽지 않고 바르지 않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는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진실로 소중한 일은’으로, ‘나무 병’은 ‘나무통(또는 ‘통’)’으로,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은 ‘따가운’으로,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은 ‘자작나무에 칼집을 내는 일’(‘saigner’는 ‘칼자국을 내다’는 뜻이 있다. 자작나무 수액을 받으려고 밑줄기에 칼집을 내는 것이다)로, ‘버들가지를 꼬는 일’은 ‘버들바구니를 짜는 일’(‘osier’는 ‘버들광주리·버들바구니’ 뜻도 있다)로,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베틀’은 베를 짜는 틀(도구)이다)은 ‘베틀(또는 ‘베 짜는’) 소리는 이내 잦아들고’로,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fait’는 영어의 ‘make’와 같은 뜻인데,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길 때는 적절하게 움직씨를 찾아 옮겨야 한다)은 ‘빵을 굽고 포도주를 담그는 일’로, ‘정원’(‘jardin’은 보통 ‘뜰’을 뜻하지만 ‘풍요로운 땅’을 뜻하기도 한다)은 ‘기름진 땅’으로,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마늘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종자 마늘을 심는다)은 ‘양배추 씨를 뿌리고 마늘을 심는 일’로 하는 것이 나을 성싶다.

곽광수는 시 4행을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로 옮겼으나 원문에서 ‘오리나무들’은 “des aulnes”로 되어 있다. 여기서 ‘des’는 ‘몇몇’을 뜻한다. 그래서 이렇게 옮길 수도 있다. “암소는 오리나무 그늘을 떠나지 않고” “오리나무 그늘 아래 암소를 지켜보고(지켜보는 일)” ‘오리나무’를 단수로 하니 ‘암소들’도 자연스럽게 단수가 되었다. ‘암소’와 ‘오리나무’를 단수로 하더라도 문맥상 이것을 ‘암소 한 마리’나 ‘오리나무 한 그루’로 읽을 까닭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일들’, ‘이삭들’, ‘암소들’, ‘오리나무들’, ‘자작나무들’, ‘귀뚜라미들’, ‘달걀들’을 ‘일’, ‘이삭’, ‘암소’, ‘오리나무’, ‘자작나무’, ‘귀뚜라미’, ‘달걀’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도유럽어는 단·복수를 뚜렷하게 구별한다. 우리는 “순이야, 귤 먹어라!” 해도 ‘귤 하나만 먹어라.’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반드시 “순이야, 귤들 먹어라!”(Soon-i, eat some tangerines!)”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쓰지 않으면 바르게 쓴 말이 아니다. 보통 영문법과 국문법에서 이것을 단지 수(數)의 문제로 다루는데, 사실 이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과 관계가 있다. 이는 희랍 세계관과 불교 세계관의 차이이기도 한다. 이것은 다음에 다루겠다.

잠의 시 가운데 유독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종철의 글 ‘흙의 문화를 위하여’(‘녹색평론’ 2002년 3-4월호)와 관계가 깊다. 이 글은 2002년 전주 한울생협 총회에서 했던 강의를 정리한 글인데, 여기서 김종철은 잠의 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를 들면서 강의를 마무리한다.

“제목이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로 되어 있는 작품인데, 이 시에서 어떤 일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는지 들어봅시다. (……) 이런 ‘위대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저도 정말 간절해요.”

이 대목을 잘 살펴보면 김종철은 이 시의 제목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알고 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런 경우는 사상가들의 글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 보면 그 사상가는 자신의 체계 속에 해결의 실마리를 벌써 품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캐스트 세계의 명시 편’에서 문태준 시인도 잠을 소개하면서 이 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를 들고 이런 말을 한다.

“프랑시스 잠은 실로 이런 일이 인간이 해야 할 숭고한 일이며 위대한 일이라고 긍정하고 지지한다.”

김종철도 문태준도 이 시의 제목이 문제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어떤’ 일이 ‘위대한’ 일인지 들어보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김종철과 문태준의 글을 읽으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징후적 독해’의 한 사례를 볼 수 있었다.

아래에 잠의 시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네이버 프랑스 사전만 참고해서 옮겼다. 2행은 아무래도 마르코복음 2장 23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는 제자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따진다. 왜 안식일에 남의 곡식에 손을 대고 타작(일)을 하느냐고 몰아세운다. 그러자 예수는 안식일이란 것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진실로 소중한 일은……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진실로 소중한 일은
나무통에 우유를 담고
따가운 밀 이삭을 따고
오리나무 그늘 아래 암소를 지켜보는 일.
자작나무에 칼집을 내고
잘잘잘 흐르는 개울 옆에서 버들바구니를 짜는 일.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티티새와 아이들이 잠들 때
잦아든 벽난로 곁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 절절하게 울 때
베틀 소리는 이내 잦아들고.
빵을 굽고 포도주를 담그고
텃밭에 양배추 씨를 뿌리고 마늘을 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을 가져오는 일.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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