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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천 개의 얼굴을 가진 장
오일장 없애려는 시도 끊임없이 이어져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8-02-21 06:05:01
▲ 1920년대 광주 작은 장터. 광주천의 부동교 근처에 있던 백사장 위에 있었다.
 걸어서 10분 내 거리, 필자가 우리 동네라고 생각하는 공간에는 4군데의 대형마트가 있다. 처음 필자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올 때만해도 동네엔 대형마트란 게 없었다. 고만고만한 작은‘슈퍼’가 전부였다. 무슨 택지라고 하여 이사는 왔건만 사실 아파트 건설업체들이 분양을 위해 가져다 붙인 짝퉁 택지라서 그런지 토지구획정리만 한 땅에 아파트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상가랄 것은 없었다. 그래서 승용차로 5분 정도인 큰길 네거리까지 나가 장을 보곤 했다. 큰 아이도 같은 거리만큼 걸어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늘면서 이른바 근린시설들이 모습을 갖춰갔다. 동네엔 새로 초등학교가 생겨 아이는 그곳으로 전학을 했다. 전형적인 동네 빵집 대신에 유명 브랜드의 빵집도 문을 열었다. 덩달아 대형마트들도 하나둘 등장했다. 그런데 늘어난 수만큼 마트 간에 경쟁이 심해졌던 모양이다. 마트 가운데는 몇 번 이름을 바꾼 곳이 있다. 그만큼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일 것이다.
 
▲모든 게 단순해진 마트, 장터와는 달라
 
 낯을 가리는 성미일까, 아니면 장을 보는 게 주로 아내의 몫이라서 그럴까 마트를 가도 아는 얼굴이 드물다. 계산대 점원도 늘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필자를 기억해주는 건 포인트 누적을 위해 점원한테 불러주고 점원이 “아무개 고객님 맞냐”고 되물을 때 듣는 숫자뿐이다.

 마트가 시장의 영어 표현이란 건 누구나 안다. 시장은 또 오일장 같은 부정기 시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쯤 들르는 마트가 필자에겐 ‘시장경제’라는 단어에 나오는 시장만큼이나 추상적이다. 풋풋함이니 정이니 하는 감정 교환이 깃든 재래시장이나 오일장 같이 ‘복잡함’은 덜한 대신에 모든 게 단순한 마트는 역설적이게도 추상적인 공간이다. 그래도 굳이 마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바쁜 세상에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자동문을 나서면 그만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예전의 오일장이나 그 장터가 어떤 곳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예전에도 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기능이 가장 먼저였다. 아무리 오일장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그곳이 상거래 공간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예전엔 사람들이 모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장은 대단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장은 상업적인 공간 이상의 다양한 얼굴을 지녔다.

 1862년 함평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몇 해 동안 함평현감들이 빼먹는 통에 축난 창고를 채운다고 세금을 거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함평읍내의 적촌리 장터였다. 1896년 광양민란 때 민화행이란 사람이 거사를 모의한 것도 섬진강 너머 하동장터였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중 하나도 고부의 말목장터였다. 장터가 요즘말로 하면 시위의 단골 장소였던 건 꽤 유서 깊은 전통이었던 셈이다.
 
▲쓸데없고 불건전한 공간으로 여겨
 
 그래서일까? 1919년 우리가 삼일운동이라 부르는 만세운동도 사실은 지역 단위로 보면 ‘장날 만세운동’일 때가 많았다. 광주시내에서도 그해 3월10일과 13일에 각각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들 날짜는 모두 양력이고 당시 장날은 음력으로 헤아렸으므로 환산하면 2월9일과 12일로 각각 작은 장날과 큰 장날이었다. 물론 시위장소가 장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오일장을 없애려 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70년대 장을 오가는 데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한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추진했다. 하지만 농촌지역에서 장 말고 다른 상거래 대안이 없었다. 대안이라고 동네마다 설치를 장려한 ‘구판장’이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양반들이 둘러앉아 막걸리나 들이키는 장소가 됐다. 기본적으로 장을 없애자는 주장은 그것을 단순히 상거래 공간으로만 생각한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라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장을 쓸데없고 ‘불건전한’공간으로 본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장이 처음 등장했을 때 조선의 양반관리들도 그랬고 일제도 그랬다. 삼일운동 직후 광주에선 장터를 없애고 그 자리를 일본군 훈련장을 만들려 했다. 이를 추겨든 건 일제였지만 이에 부화뇌동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1919년 만세운동에 화들짝 놀란 일제는 각지에 군대를 파견했다. 광주에도 송정리역을 통해 1개 중대가 파견됐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미덥지 않아선지 일제는 전국에 군대를 분산 배치해 상주시키려 했다. 이때 지역유지라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네 도시로 군대를 유치하면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며 유치운동에 부산을 떨었다. 광주에서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지라는 사람들이 이 일에 발 벗고 나섰다. 다행이 그런 일은 광주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광주의 장터들은 이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원래의 자리를 내주고 떠나야 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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