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천변 범람원 광장이 되다

▲ 20세기 초엽의 광주천. 앞에 광주천을 가로막은 것이 조탄보이고, 그 뒤편의 거목 왼쪽으로 마을 곁에 보이는 것이 작은 장터다.
 광주의 장이 처음 있던 북문 앞을 떠나 광주천으로 옮겨온 때는 임진왜란 전후로 한 시기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장소가 구체적으로 광주천의 어디쯤이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적어도 18세기에 광주천변에서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어 열렸는데 큰 장터는 지금의 광주교 아래쪽, 작은 장터는 부동교 일대에 있었다.

 그런데 두 장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광주천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광주천은 지금처럼 인공제방을 따라 거의 일정한 강폭과 일직선에 가까운 유로를 가진 하천이 아니었다.
 
갑자기 좁아진 강폭, 범람원 형성
 
 우선, 시내를 관통하기 직전인 사직공원 앞에 있는 다리인 금교에서 강폭은 갑자기 좁아졌다. 사직공원 쪽에서 강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인 돌출부 때문이었다. 현재 양파정과 양림치안센터가 들어선 이 돌출부를 옛 광주사람들은 ‘꽃바심’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알 길이 없으나 여기서 꽃은 불쑥 튀어나와 있는 지형을 가리키는 말인 곶(串)에서 온 말로 추정된다.

 꽃바심으로 인해 강폭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그 상류에서는 강물이 자주 정체돼 주변지역을 침수시켰다. 그로 인해 지금의 금동과 양림동 사이에는 넓은 범람원이 형성됐다. 1925년 7월 광주천 범람으로 전남도청 앞 광장까지 침수됐다는 얘기나 과거에 양림동 오거리까지 물이 자주 들어왔다는 얘기는 모두 이 범람원과 관련된 말들이다.

 꽃바심을 빠져나온 강물은 수백 미터를 흐르다가 다시 강폭이 좁은 곳을 만났는데 지금의 광주공원 앞 광주교 일대다. 이곳도 꽃바심이라 불렀는데 사직공원 앞 꽃바심과 구분하기 위해 ‘아래 꽃바심’혹은 물이 많다는 뜻으로‘물덕밭’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곳 꽃바심에서도 강물의 배출이 더뎌지면서 그 위쪽인 금교와 광주교 사이에 넓은 범람원이 생겼다.

 물론 광주교를 지난 다음부터 광주천물을 가로막는 좁은 목은 없었다. 그러나 홍수로 영산강 수위가 높아질 때면 배수가 원활치 않아 주변지역을 침수시키면서 다시 넓은 범람원을 만들었다. 이 범람원에 자리 잡은 것이 ‘유림수’라는 숲이다. 일각에서 유림수가 본래는 광주천과 그 지류인 서방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제방림이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물이 싣고 온 토사가 만든 동네

 한편 원래 광주시내는 광주천 강물이 싣고 온 토사가 수천 년 동안 쌓여 생긴 자연제방 위에 형성된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광주 시내가 자연제방을 따라 길쭉한 모습을 띤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충장로와 금남로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곧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자연제방과 광주천 사이에는 군데군데 백사장이 있었는데 금교와 광주교 사이에도 수 백미터에 달하는 백사장이 반원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고려 시대 말엽 지방관으로 광주에 온 김상이란 사람이 광주천 물길을 돌리고 섬처럼 된 곳을 만들어 ‘석서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는데 석서정이 들어선 곳이 이 백사장이었다. 또한 금교에서 빠져나온 강물이 백사장과 맞닿은 지점에 보를 쌓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조탄보’다. 보가 있는 곳은 강폭이 좁은 지점이므로 둑을 짧게 쌓아도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탄보를 빠져나간 물 가운데 큰 물줄기는 이 백사장의 우안, 즉 사동 쪽으로 흘렀고 좌안, 즉 불로동 쪽에 붙어 작은 개울이 나 있었다. 석서정이 “섬처럼 된 곳에 있었다”는 말은 광주천이 백사장을 중심으로 두 갈래로 흐르는 가운데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곳이 바로 작은 장터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큰 장터는 광주교 아래쪽의 범람원에 있었다. 이 범람원의 우안인 수기동이나 누문동 쪽은 군데군데 인공제방이 있었으나 그 맞은편인 양동 일대에는 이렇다 할 제방이 없어 범람원은 더 크고 넓었다. 이곳은 광주 사람들이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을 목격한 장소이기도 하다. 1918년 겨울 일본인 조종사 야마가타가 기체의 위아래로 날개 두 쪽을 단 복엽기를 몰고 와 광주상공을 비행했다. 당시만 해도 비행장은 고사하고 간이 활주로가 따로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야마가다는 자신이 몰고 온 복엽기를 광주천변에 착륙시켜야 했는데 그 자리가 큰 장터가 있는 이곳 광주교 아래쪽 범람원이었다.

광주 천변에 조성된 두 개의 장

 이처럼 광주교 아래쪽 범람원은 상류 쪽 범람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었고 그래서 큰 장터도 넓은 면적을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 시장’(1924년)란 책을 보면, 작은 장터의 면적은 2500평, 큰 장터의 면적은 7200평이라고 했다.

 두 장터의 성격도 조금 달랐다. 역시 ‘조선의 시장’에 따르면 작은 장은 주로 광주시내에 사는 상인과 소비자들이 이용했고 큰 장은 광주, 나주, 장성, 담양, 화순 등지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인다고도 했다. 거래규모도 큰 장은 작은 장의 3배 수준이었다. 두 장터는 그렇게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1920년대 전반기까지 이렇게 광주천변에 있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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