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1년(신유년) 휘문 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들의 경주 수학여행 사진이다. 1921년이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지 이태 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1993년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내면서 머리말에서 한 말이다. 원래 원문은 이렇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나는 이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사실은 꼭 맞는 말도 아니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서는 왠지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아는 것’, 다시 말해 ‘지식’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억압’이나 ‘배제’, ‘주눅’ 같은 것을 느낀다. 절에 가서도 무얼 모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꽃을 보더라도 그 꽃 이름을 모르니까 그 꽃이 편안하지도 예쁘지도 않다. 나는 모르니까. 눈에 블라인드가 쳐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유홍준의 말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은 느끼는 만큼 더 깊이 알게 되고, 보이는 만큼 새롭게 알고 느낀다.” 이 말은 지식에 기대지 않고 세상을 보겠다는 나만의 고집이기도 하다. 또 사실 지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꼭 맞는 것도 아니고, 그 지식 때문에 도리어 진실을 볼 수 없을 때가 많다.

 경주의 첨성대를 볼 때,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라는 ‘지식(아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런 지식으로 보게 되면 꼭 그만큼만 보이고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 보이게 한다. 첨성대는 아래 기단에서 꼭대기 정자석까지 9.108미터밖에 안 된다. 아파트 3층 높이다. 우리는 학자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9미터 위에서 보나 9미터 아래에서 보나 별이 달리 보이겠나, 무슨 차이가 있나, 차라리 경주 남산에 올라 보는 것이 낫지 않겠나, 하고 말이다. 더구나 가운데 사각 창을 통해 힘들게 꼭대기에 오르더라도 두 사람밖에 설 수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도 있다. 불안하기 짝이 없다. 별을 관측하다 속이 불편하면 다시 그 구멍으로 내려와 볼일을 봐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하는 천문대가 이렇게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지식이 완벽하지 않듯,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는 만큼 안 보이는 것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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