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해냄, 1998. 박노해는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 남짓 징역살이를 하다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된다. 이 산문집은 그 이듬해 나왔다.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어문학계에서는 아내를 ‘안채에 있는 사람’으로 풀이한다. ‘안ㅎ’에 곳을 뜻하는 ‘에 또는 애’가 더해져 ‘안해’였다가 16세기쯤에 ‘아내’로 굳어진 것으로 본다. 이 말은 철저히 유교의 굴레 속에서 여성을 집구석에 꼼짝달싹 못하게 가둔 것에서 생겨난 말이다. 흔히 ‘마누라’는 낮춤말로 아는데 그렇지 않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마누라는 ‘마노라’에서 왔는데, 이 말은 처(妻)나 귀인(婦人)의 존칭으로 쓰였고, 15세기에는 상전이나 임금을 뜻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높은 말이 처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아내를 안채에 가둬 놓고, 함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다. 사대부 집 구조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남녀를 구분하여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짓고, 여성을 배제하고 통제하고 업신여긴다. 그러면서 존칭인 마누라가 한순간에 낮춤말이 되고, 그 자리에 유교의 아우라가 덧칠된 ‘아내’가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박노해의 풀이는 잘못되었는가? 학자들의 주장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에 대한 말뿌리 연구는 아주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노해 같은 직관은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이 ‘바다’와 ‘그림’의 뿌리를 ‘받아들인다’와 ‘그리워하다’에서 찾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박노해의 직관은 유교적 아우라 속에 있는 ‘안사람’ ‘집사람’ ‘아내’를 현대에 맞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멋지고 통쾌하기까지 한다.

 박노해는 ‘아내’의 기원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다’, ‘나쁜 사람’, ‘알뜰하다’의 내력도 새롭게 풀이한다. ‘터무니없다’는 ‘터(땅)에 무늬가 없다’에서,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에서, ‘알뜰하다’는 ‘알이 들어차다’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터무니없다’와 ‘알뜰하다’의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쁘다’의 어원은 연구된 바 있다. ‘나쁘다’는 ‘높다’의 맞견준 말 ‘낮다’의 ‘낮’에 접미사 ‘브다’가 더해 생긴 말 ‘낫브다’에서 온 것으로 본다. 원래는 ‘높지 않다’ 또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는데, 18세기 이후 ‘좋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쁜 사람’은 ‘높지 않고 낮은 사람’ 또는 ‘부족한 사람’이다. 박노해가 ‘나뿐인 사람’으로 풀이한 것과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우리말의 뿌리를 찾을 때는 어문학 지식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직관과 상상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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