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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광주천 큰 장·작은 장 합한 사정시장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8-03-21 06:05:01
▲ 1930년대 사정시장.
 광주천변의 큰 장과 작은 장터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1921년부터 나왔다. 이 시기는 3·1운동 직후다. 일제에겐 장터가 만세시위의 진원지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고 그와 관련해 광주에 연대 규모의 일본군을 상주시키려 했던 움직임이 일던 때이기도 했다.

 장터의 통합은 처음부터 장터 위치의 변경과 광주천 개조공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24년 1월 장터를 당시 동네이름인 ‘교사리’로 이전한다는 결정은 확정지었다(조선총독부 관보 1924년 1월15일자). 1926년 6월에는 광주천 가운데 시내 관통구간, 다시 말해 사직공원 앞 금교에서 양동 복개상가 아래쪽까지 약 2km의 개수공사를 확정, 고시했다(조선총독부 관보 1926년 6월 5일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광주천의 모습, 즉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물길은 이 무렵 시작된 하천공사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하천공사와 병행해 큰 장과 작은 장이 합쳐졌는데 이를 처음에는 ‘교사리 시장’이라고 했다.
 
탈 많았던 광주천 매립 공사
 
 교사리 시장은 얼마 뒤 해당 지역이 광주읍에 편입돼 사정(社町)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면서 ‘사정시장’이라 불렸다. 광주읍에서 관할한다는 뜻으로 읍영시장, 1935년 광주읍이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광주부로 승격된 뒤에는 부영시장이라고도 했다.

 사정시장의 개설 시기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1931년 신문들엔 시장이 이 해에 개장됐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1938년에 발간된 ‘광주향토독본’이란 책자엔 개설 시기가 1928년으로 나온다. 반면 2017년에 펴낸 ‘광주도시계획사’엔 1932년에 개설됐다고 돼있다. 어느 자료가 정확한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시장 개설의 기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터 이전과 사정시장의 개설이 광주천 공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광주천 공사와 사정시장의 개설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광주천 매립공사비의 과다 지급이 논란을 빚었다. 이 논란은 1928년까지 이어졌다. 빚을 얻어 마련한 공사비를 새로 매립한 천변 토지를 팔아 갚으려고 했던 계획도 토지매각이 원활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전남대학교 김광우 교수가 ‘광주시사’ 제2권(1993년)에 정리한 글을 보면 토지매각은 1934년까지 찔끔찔끔 이루어졌다.

 가장 큰 논란은 시장 내 토지분양을 둘러싸고 당시 광주면장과 광주천 공사를 맡은 토목업자 간의 결탁 의혹이었다. 토목업자가 시장의 노른자위 땅을 선점하면서 이에 조선인 상인들이 그 배경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 논란으로 하천공사를 주도했던 일본인 면장은 1929년에 사임했다.

 사정시장은 이전 장과 몇 가지는 같고 몇 가지는 달랐다. 시장 이전과 함께 원래는 사정시장을 연중 개장하는 상설시장으로 운영하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오일장에 익숙한 조선인들의 오랜 관습에 밀려 시장은 계획과 달리 큰 장날과 작은 장날에 맞춰 열리는 정기시장 형태를 유지했다. 날짜 끝이 2일과 7일이면 큰 장날, 4일과 9일이면 작은 장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장날은 오늘날 북구 말바우시장에서 그대로 사용 중인데 이 관행이 처음 시작된 곳이 사정시장이었다.
 
정기시장 형태, 말바우시장에서 전승
 
 한편 이전 장터엔 울타리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정시장은 아마도 1932년부터 울타리를 둘러쳤던 것 같다. 이는 시장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들에게서 시장 사용료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국가기록원이 소장 중이고 푸른 광주21의 윤희철 박사가 소개해준 사진과 도면에는 이 울타리를 포함해 1930년대 사정시장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장은 다섯 군데의 문을 통해서 출입할 수 있었고 점포들은 격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사정시장 사용료 부과는 1932년 2월 ‘광주읍 시장사용 규칙’이 공포된 뒤부터 이루어졌다.

 시장의 연간거래액은 크게 증가했다. 1910년대 큰 장과 작은 장의 연간 거래액 합계는 10만 엔 정도였다(<조선지지자료>, 1919). 1920년대 초반에 아직 두 장으로 나뉜 상태에서 큰 장의 거래액은 20만 엔을 넘어섰다(조선총독부 관보 1920년 8월 5일자). 그리고 1930년대 말엽 사정시장의 거래규모는 연간 150만 엔 이상이었다(경성상공회의소, <경제월보> 1938년 12월호). 그러나 사정시장의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정시장은 구동 37번지 일대에 있었다. 광주공원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 저지대에 해당한다. 그런데 광주공원은 일제강점 초기부터 일본신사가 세워졌고 신사의 지위가 1930년대 초엽 전남도에서 운영하는 신사로, 1941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신사인 이른바 국폐신사로 격상됐다. 국폐신사로 격상될 때는 태평양전쟁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전쟁은 정신적 광기를 동반했고 일제는 신사가 있는 광주공원을 성역화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공원 입구에 버티고 선 사정시장이 성역에 끼얹은 오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국폐신사 승격을 내세워 사정시장을 당시 기준으로는 도시 경계인 양동으로 밀어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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