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원 신사 정비 여파 사정시장 이전 본격화

▲ 양동시장의 형성과 관련이 깊은 광주신사. 신사는 지금의 광주공원 맨 위쪽 광장의 현충탑 자리에 있었다.
 면적 8만㎡, 입주한 상점 1000여 개. 양동시장의 규모다. 물론 이것은 넓은 의미의 양동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동시장주식회사가 관할하는 좁은 의미의 양동시장도 면적 1만㎡에 입주상점 300여 개의 적지 않은 규모다.

 양동시장은 초기 이름은 ‘천정시장’이었다. 시장이 처음 이 자리에 생긴 것이 일제강점기 때였고 당시 양동의 이름이 천정(泉町)이었기 때문이다. 또 천정이란 이름은 양동 255번지 아래에 있었던 샘에서 비롯됐다. 이 샘은 2014년 도로 확장으로 매립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양동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서 MBC방송국이 있는 덕림산을 거쳐 양동초등학교 뒷산인 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광주천 사이에 있는 좁고 기다란 동네다. 광주시내에는 총 201개의 법정동이 있는데 동네 면적에 비해 이렇게 길쭉하게 생긴 동네는 양동이 유일무이하다. 아마도 이것은 양동이 천정이란 이름으로 불릴 때부터 능선과 광주천 사이에 낀 특이한 입지조건의 결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양동 이름이 천정
 
 조선시대만 해도 이곳엔 동네가 없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태평교 (복개상가의 동쪽에 있는 다리) 자리에 자그마한 나무다리가 있어 누문동과 큰 장터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의 양동 일대에는 자연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대한제국 시절에 큰 장터에서 돌고개를 걸쳐 송정리로 나가는 신작로(요즘 월산동의 세칭 ‘보살거리’)가 놓인 뒤에도 월산동의 덕림산 아래에 덕림, 발산 서쪽기슭인 농성동에 ‘연례리’란 마을이 있는 정도였다.

 물론 양동에 시장이 생긴 건 조선시대에 큰 장이 생기면서부터다. 장터는 대략 지금의 양동 61번지인 삼익맨션과 우진아파트 일대에 있었고 그 터는 사정시장의 개설과 맞물려 다시 가축시장으로 개편되어 계속 이용됐다.

 이들 시장이 지금의 양동시장 자리로 다시 터를 옮긴 것은 엉뚱하게도 광주공원 안에 있던 광주신사 때문이었다. 광주신사는 일제강점 초기부터 광주 거주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됐고 이것이 1917년부터 광주군의 재정지원을 받는 신사로 격상됐다.

 그런데 1938년 신사의 운영주체가 당시 광주에서 전라남도로 승격되면서 신사 주변의 정비문제가 대두됐다. 이 무렵 광주천변의 좌안은 상류 쪽에서부터 사정시장~광주공원(신사)~가축시장~제사공장~공설운동장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일제는 이 가운데 현재 양동 60번지의 KDB 빌딩 자리에 있던 제사공장을 그대로 놔둔 채 사정시장과 가축시장을 공설운동장 자리로 내쫓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공설운동장이란 일제가 1930년대 초엽에 만든 것으로 막대한 조성비에도 불구하고 시내에서 먼데다 사용료까지 받아 유명무실한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사정시장과 가축시장을 이곳으로 옮기고 공설운동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은 1939년에 확정됐다.
 
▲ 사정시장 점포 400여곳→천정시장선 300여개로
 
 그러나 이 과정은 계획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공설운동장 전체를 새로운 시장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일제 패망 때까지 실현되지는 못했다. 제사공장 옆의 공설운동장 일부는 해방이 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시장은 1943년에야 지금의 양동시장 자리로 이설된 듯하다.

 시장 조성은 옹색하기 그지없어 사동시장의 점포를 뜯어다가 세웠고 사정시장 때보다 규모도 더 작았다. 사정시장 때는 담으로 둘러친 구역 안에 400여 점포가 있었는데 천정시장에는 300여 개 정도였다(박선홍, <광주1백년> 참조).

 흥미롭게도 초기의 천정시장도 담이 쳐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천정시장이 광주부에서 운영하는 이른바 부영시장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울타리 안에 입주한 점포에게서 사용료 등의 명목으로 세금을 걷기 위해 구획을 나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담은 1960년대 초엽에야 헐렸다고 한다.

 한편 원래 계획대로라면 천정시장은 공설운동장 전체를 사용하고 이로 인해 공설운동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할 예정이었다. 이 공설운동장 이전은 1939년에 착수해 1940년에 끝마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1939년 초엽이 되도록 새로운 운동장 부지는 선정되지 않은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내심 그 장소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던 것 같은데 그 장소란 지금의 무등경기장 일대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일제 말엽까지 실행되지 못했는데 무등경기장 자리에 운동장이 처음 생긴 것은 1949년이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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