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시험장’ 있던 자리서 연유

▲ 일제강점기 임동에 있었던 종연방직 전남공장. 이 공장에 밀려 전남 농사시험장이 옮겨가면서 지금의 농성동이란 지명이 생겼다.
 잊을 만하면 서구 농성동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묻는다. 작년에 한 번 그랬고, 최근에도 주위의 한 분이 필자에게 물었다. 사실 필자도 아는 게 없어 오래전부터 궁금하던 차였다.

 궁금증은 하필 ‘농성인가’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궁금증은 사실 아주 유치하게 시작됐다. 필자가 학창을 보내던 1980년대엔 철야농성, 연좌농성 등 농성이란 단어가 아주 흔했다. 물론 농성동의 농성(農城)과 시위를 뜻하는 농성(籠城)은 한자도, 의미도 다르다. 하지만 두 단어의 음이 같은데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의 시위를 담당하는 서부경찰서가 당시엔 농성동에 있었던 것도 농성동에 대한 얄팍한 관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관심이 얄팍해서인지 농성동이 왜 농성동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묻어두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필자처럼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농성동이 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 더듬어봤다.

 인터넷에서 농성동의 유래를 찾으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라는 사람이 이 근처에 개천을 막아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작은 댐인 보를 쌓았는데 이 보에서 농성이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어떤 사이트엔 보의 이름이 ‘농성보’였던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얘기는 사실에서 너무 멀리 나간 듯하다.
 
▲1935년 농사시험장 이전하면서 유래
 
 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일부는 주월동 무등시장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된 이곳에는 본래 ‘극락천’이라는 작은 개천이 있었다(영산강을 뜻하는 극락강이 아니고 극락천인데 유념하면 좋겠다). 이 개천의 중간에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란 사람이 조선시대에 보를 쌓았던 것도 문헌에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보를 농성보라고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오히려 이 보를 보성군수를 지낸 사람이 쌓았다고 해서 ‘보성보’라고 했다는 기록만 잔뜩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보의 이름에서 농성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보가 농사와 관계된 수리시설이고 농성의 한자(農城)가 농사와 연관되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농성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5년이다. 이 해에 광주군 광주읍은 광주부로 승격된다. 요즘 말로 하면 광주시가 된 것이다. 농성정(農城町)이란 동네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해였다. 그 이전엔 농성이란 지명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런 자료를 찾을 순 있겠지만 과문한 필자가 노력해본 것에 의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많고 많은 지명 가운데 하필 ‘농성’이었을까? 농성의 한자에 농사를 뜻하는 ‘농’자가 들어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디 농성동은 광주군 군분면 신례리라 부르던 동네였다. 그런데 1934년 전라남도 농사시험장(전남농촌진흥원의 전신)이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그 직전까지 이 시설은 임동에 있었다. 그런데 그 부지에 종연방적 전남공장이 들어서면서 그 땅을 내주고 이곳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 이듬해 농성정이란 이름을 정한 것은 이 농사시험장의 역할이 컸다. 물론 그 이전의 지명인 신례리를 따서 신례동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성보 옆에 있던 신례리는 큰 마을이 아니었고 요즘처럼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 동네이름을 정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농성정이라 정했던 것 같다. 사실 해방될 무렵까지도 이런 사실은 광주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농성정은 1946년 그 지명이 일제강점기의 냄새가 짙다고 하여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 사용한 것이 근농동(勤農洞)이었다. 이곳에 농사시험장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지명이었다.
 
▲후신 농촌진흥원 90년대 나주로 이전
 
 근농동은 1947년 다시 농성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지명변경이 올바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분명 농성동이 농사시험장, 즉 훗날 전남농촌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꾼 기관 때문에 생겼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농촌진흥원은 1990년대 초엽 공무원관리공단에 부지를 넘기고 지금처럼 나주 산포면으로 이전했다. 이제 농성동이란 지명만이 이곳에 농사시험장 또는 농촌진흥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따름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동네이름은 많다. 동명동도 순순하게 해당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이름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동정(東町)이라 한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근처 산수동도 마찬가지다. 산수(山手)는 일본말로 산기슭을 뜻하는 단어에서 왔고 이는 산수동이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지형에 착안해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어디 이것뿐이랴. 그렇지만 이런 사례가 있다 하여 다시 새로운 이름을 만들자는 의견을 꼭 현실적이지는 않는 듯하다. 농성동의 옛 농촌진흥원에서 벚꽃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나무가 언제 심어졌고 왜 하필이면 벚꽃인지를 안다 한들 이 봄에 그곳에 대한 유년기의 추억을 묻어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지명 역시 더러는 위로부터 강요된 것인 것이지만 그것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될 때가 많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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