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농업교육기관 ‘기구한 운명’

▲ 1930년대 응세농도학원.
 신자가 아니라면 쌍촌동에 있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청에 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광주교대구청은 2006년 임동성당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필자는 수 년 전에 일 때문에 출장삼아 교구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교구청 건물이나 주변 정원을 둘러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광주대교구청 부지는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알려져 있고 줄여서 평생교육원이라 부르곤 한다. 그런데 이 땅에 과거 ‘응세농도학원’이란 사립 농업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농촌지도자 양성 위한 대규모 실습지
 
 응세농도학원은 1934년 11월, 당시 금남로에 살던 부호 지응현이 설립했다. 지응현은 원래 담양 대전면 중옥리에 살았는데 중도에 광주로 나와 대지주로 성장한 인물이다. 금남로 일대가 개발되기 전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했고 그 흔적으로 그 후손들이 구성로(이른바 역전통거리)에 ‘붕남빌딩’을 건립하기도 했다. 지응현 자신은 지금의 금호지구에 지씨 사당인 ‘병천사’를 건립해 현재도 이 사당은 그곳에 있으며, 한때 광주공원 내 오층석탑 앞에 ‘붕남정’이란 정자를 짓기도 했다.

 지응현이 응세농도학원을 설립한 목적은 농촌지도자 양성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 지계선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여하튼 이 학원의 학생 수는 24명이었고 이들은 대개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졸업자들이었다.

 그런데 학생 수에 비해 학원의 규모는 꽤 커서 학원의 전체 부지는 13만 평에 달했다. 교정 내 건물이라고는 강사와 학생들의 기숙사와 몇몇 부대시설이 전부였지만 이처럼 드넓은 면적을 지녔던 것은 농업교육기관의 특성상 전답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실습지 때문이었다. 이 학원 부지에는 양어장까지 두고 있을 정도였다.

 학원의 운영은 거의 군대식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오전에 이론수업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다시 오후 이론수업과 실습을 실시했고 밤 10시면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방학이나 휴일도 없었다. 한번 입교한 학생들은 꼭 1년을 이런 식으로 수업을 받고 수료했다.

 이 학원이 모델로 삼은 것은 덴마크의 농업교육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익히 들은 그룬트비, 달가스 등 애국적인 덴마크 농업개혁가들이 이 학원에서 가르친 인물들이었다. 물론 농촌지도자 양성과 농업 개혁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이론수업 외에 농업실습이 많았던 것을 보면 단순히 정신무장이나 하고 수료하는 그런 학교는 아니었듯 하다.

 그런데 이 학교의 운명은 기구한 편이다. 응세농도학원 부지는 1940년대 초반에 군용지로 수용됐다. 당시만 해도 광산군 극락면 쌍촌리라고 부르던 호젓한 근교 농촌지역이던 이곳을 일제가 군용지로 징발한 것은 학원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금의 상무지구에 있던 비행장을 일본해군이 차지하고 더불어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한 숙영과 훈련 등의 시설을 이곳에 짓기 위함이었다. 자연히 응세농도학원은 이를 계기로 폐교됐다.
 
▲군용지에서 학원으로, 다시 군 훈련장으로
 
 그런데 해방 후에 지씨 일가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육영사업을 할 요량으로 동구 지산동에 1946년 응세축산중학교를 설립했고 다시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이 학교는 교명을 바꿔 응세중학교와 광주수의고등학교로 개편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이들 학교의 주소를 보면 현재 살레시오 여자 중고등학교 자리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지응현이 중도에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학교 부지를 살레지오 측에 기부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이들 세 학교의 학적부는 살레지오 여고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응세농도학원 부지는 해방 전까지 일본해군 군용지로 사용됐다. 당시 일제는 이 부지 외에 인근 지역까지 군용지로 징발했는데 화정동의 옛 국군통합병원 자리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일대, 쌍촌동의 시영아파트 등 아파트 단지 일대와 호남대학교의 옛 쌍촌동 캠퍼스 자리 등이 그런 곳이었다.

 호남대 쌍촌동 캠퍼스 같은 곳은 1930년대 중반 임동에 종연방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내쫓기듯 이곳에 와 있던 전남임업시험장이 이때 군용지로 수용되면서 다시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했으니 응세농도학원보다 더 운명이 기구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때 군용지가 된 땅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계속 군용지로 사용됐다. 화정동의 국군통합병원 자리도 그랬다. 일제 말엽에 일본군 병원으로 사용된 이유로 해방 후에 이곳은 우리 군의 제3육군병원이 들어섰다. 이 제3육군병원 시절인 1950년 여름에는 이곳에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북한군이 산동교 앞까지 밀려올 만큼 급박한 상황일 때 군은 병력이 부족해 이곳에 입원 중이던 병사들에게 총을 쥐어주며 산동교로 나가 싸우라 했다고 한다. 그 뒤에 제3육군병원은 제17국군병원으로 개편됐고 그 부지의 일부는 현재 광주여자고등학교가 이전, 사용 중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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