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 1978년 제1기 들불야학 강학들. 앞 맨 왼쪽이 박기순이다. 들불야학 교사들은 청소년 노동자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다시 노동자의 삶을 배운다는 뜻을 담아 강학(講學)이라 했다. 들불야학은 1978년 광주시 서구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빌려 문을 열었다. 이 야학을 맨 처음 꾸리자고 팔을 걷어붙인 이가 박기순(당시 전남대학교 사학과 3학년)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들불야학을 연 해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세 해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자취방은 금남로 가까이에 있었다. 기열은 4학년이다. 기순은 기열을 공부시키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공장일을 그만두고 금남로 옆 황금동 황금다방에서 차 배달을 한다. 바로 이때 5·18이 터진다. 누나는 금남로에서 피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헌혈을 한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한다. 5월 26일, 기순은 공수부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기열과 함께 시골집으로 간다. 기열을 시골집으로 데려다놓고 다시 광주로 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차편이 모두 끊겨 걸어서 가야 했다. 기순은 헌혈을 너무 많이 해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 날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 하는 유언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80년 5월, 그때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탄에 맞고 곤봉과 총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골병이 든 사람들로 병상이 남아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많아 날마다 피가 부족했다. 남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총을 들고 싸워야 했기에 헌혈은 여자들 몫이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뿐만 아니라 공장 여성 노동자를 비롯하여 황금동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줄을 섰다. 기순도 그랬다.

 그때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학생도 날마다 헌혈을 했다. 박금희는 21일 기독교병원에서 헌혈을 한 뒤 집으로 오다 공수부대가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다. 한 시간 전에 헌혈을 하고 나온 병원으로 다시 시체가 되어 간 것이다.

 윤정모는 바로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생을 밀어 넣었던 사람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딱 그만큼만 내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고 나갔던 사람들의 생을 붙잡는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피를 내놓았던, 그 여리고 순박한, 채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저세상으로 떠난 이기순의 생을 들려준다. 하지만 누가 기순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런 것을 낱낱이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80년 오월 광주를 아주 자세히 들려주는 그 어떤 소설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준다.(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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