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람이 있었다

▲ 한정기의 어린이소설 ‘큰아버지의 봄’(한겨레어린이) 표지. 이 소설은 제1회 5·18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다.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광주 사람들이 80년 오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가 또 있다. 김영철이다. 그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았고, 27일 도청에서 윤상원과 함께 끝까지 싸운 사람이다. 그날 밤 윤상원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고, 그는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다. 군인들은 그를 북한에서 밀파한 간첩으로 몰면서 온갖 고문을 했다. 김영철은 윤상원과 박용준을 따라 죽고 싶었다. 왼손 동맥을 끊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이마를 세 번이나 부딪힌다. 그 뒤로 그는 정신을 아주 놓아 버린다. 1984년 나주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그 뒤 16년 남짓 나주정신병원과 여러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1998년 8월 세상을 떠난다.

 1982년 1월 3일, 박효선은 김영철을 만나고 와서 일기를 쓴다.
 
 네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미쳤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한 사람이 나였다.
-‘박효선 전집3-일기·수기’(황광우 엮음, 연극과인간, 2016), 63쪽
 
 여기서 죽은 두 사람은 윤상원과 박용준이고, 미친 사람은 김영철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박효선이다. 박효선에게 김영철은 여섯 살 위 형이다. 박효선은 1997년, 그러니까 김영철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그와 그의 부인 이야기 ‘청실홍실’을 무대에 올린다. 사람들은 이 연극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 해 뒤 김영철은 1998년 8월 세상을 떠난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죽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지나 박효선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박효선의 나이 45세였다.

 ‘큰아버지의 봄’에 나오는 큰아버지 박원상은 도청 밖에서 붙잡혔다. 같이 도청에 있었던 아버지가 형은 꼭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한테는 형이 있어야 한다고, 형이 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도청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와 큰아버지 애인 은수 이모는 어떻게 살아남았지만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큰아버지는 도청에 끝까지 남지 않고 빠져나온 것이 이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바로 그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김영철이 그랬듯 박원상 또한 정신을 놓아 버린 뒤 80년 5월 그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깨어있을 때도 잠을 잘 때는 80년 5월 광주에 있었고, 그곳에서 살았다. 시간이 80년 5월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광주 그곳에 있었다. 시간도 세월도 그를 잡아끌지 못했다.(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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