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의 ‘개구리’에 얽힌 사연3

▲ 한하운이 말년에 살았던 인천 집. 한하운은 1975년 2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이고, 그가 인천에 자리 잡은 지 25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인생에서 절반을 인천과 부평에서 산 셈이다. ⓒ한국근대문학관
 (저번 호에 이어서 씁니다)

 1920년 3월1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우리 겨레는 거리에서, 시장에서, 들판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이듬해 3월 10일, 한 시인이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바로 한하운이다.

 아버지는 함주에서 알아주는 지주였다. 함주 고을에서 아버지 땅을 부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맏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았다. 1936년 봄, 전라북도 익산 이리농림학교(지금의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축산학을 공부할 때였다. 몸이 안 좋아 경성제국대학교 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글쎄 의사가 한센병이라 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었다. 그는 모든 공부를 팽개치고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간다.

 1937년, 병 기운이 어느 정도 약해지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성혜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기서 공부를 마친 다음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 농학원 축목학계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다.(일본·중국 유학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건강한 사람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1945년쯤일 것이다. 자고 나면 검은 눈썹이 없어지고, 자꾸 코가 막혀 숨도 못 쉴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관청에서도 한센병자라는 것이 알려져 공무원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해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된다.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고,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의 집안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거리로 내쫓긴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한 집안의 장남인데도 상주가 될 수 없었다. 병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락에 숨어 어머니를 보냈다. 그에게 이 일은 평생 피맺힌 한으로 남는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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