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여인상’과 1500년 전 유행

▲ 왼쪽부터 〈사진1〉 술병을 든 신라 여인, 〈사진2〉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 〈사진3〉 밀로의 비너스. 〈미인도(美人圖)〉(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초 그리스 말기의 비너스 상. 대리석. 높이 204cm.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아주 옛날 순장(殉葬 따라죽을순·장사지낼장)이란 장례 풍습이 있었다. 말 그대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우리나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설령 이런 풍습이 한때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더구나 통일신라 옛 무덤에서는 산 사람 대신 함께 묻었던 흙인형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흙으로 사람 모양을 빚어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은 것을 토용(土俑 흙토·허수아비용)이라 한다. 왕이나 귀족 무덤을 쓸 때 살았을 적에 시중을 들었던 신하와 종, 평소 아끼고 잘 보살폈던 짐승을 그 모습 그대로 아주 작게 흙으로 빚어 시신과 함께 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토용은 순장을 대신했던 ‘흙인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산 사람을 같이 묻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위 사진에서 가장 왼쪽 〈사진1〉은 흔히 ‘신라 여인상’으로 알려진 흙인형이다. 이 여인상 또한 시신과 함께 묻은 껴묻거리다. 오른손에는 술병을 들고, 왼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있다. 실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히죽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겉에 입은 옷을 표의(表衣)라 하는데, 위아래가 하나로 이어진 원피스 같은 옷이다. 통일신라 시대 여자들 옷은 소매가 길어 웬만해서는 손을 볼 수 없었다. 이 여인상의 표의도 마찬가지다. 이는 당시 여자들이 손끝을 내보이는 것을 조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풍습은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여자들은 바깥나들이를 할 때 반드시 한삼(汗衫)을 저고리 위에 걸쳐 손을 가렸다.

 표의 아랫단을 보면 발끝이 살짝 보인다. 그런데 신코가 좀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여자들은 신코가 있는 신발을 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상을 볼 때는 똑같은 자세로 서서 그 몸짓 그대로 해 보는 것이 감상 포인트의 첫걸음이다. 두 발이 왼쪽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 여인상은 왼쪽으로 70도 정도 서 있는 상태에서 몸통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앞을 보고 있는 것이다.(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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