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도태된 유사 가족

오즈 야스지로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이름이다. 오즈는 전후 일본의 가족해체에 주목하며, 가족 간의 유대와 인간사이의 소통의 문제를 일관되게 펼치며 반열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가즈는 오즈 야스지로의 적자 자격이 충분하다. 고레에다 역시 현대 일본의 가족의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레에다는 일본의 다양한 가족 형태와 이들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천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가즈표 가족영화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하다.

영화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어른과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른이 망을 보고 소년이 물건을 훔치는 방식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보이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쇼타(죠 카이리)는 훔친 물건을 들고 귀가하는 길에 음습한 곳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정이 많은 오사무는, 버려져 있다시피 한 쇼타를 집으로 데려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리를 집안에 들인다. 도착한 집에는 할머니와 아주머니 그리고 처녀가 있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이 가족은 3대가 모여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태된 사람들로 구성된 유사가족임을 알게 된다.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들의 고정수입은 할머니에게 지급되는 연금과 가족들이 버는 약간의 돈이 전부다. 그리고 생필품은 가족들의 좀도둑질로 충당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그저 지긋이 바라본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카메라에 포착된 이들이 혈연관계로 묶인 통념상의 가족보다 유대나 정이 더 돈독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들이 서로 아껴주고 챙겨주는 모습에 공을 들이며 유사가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가즈의 가족에 대한 사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일반의 통념을 전복시키며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넌지시 내비쳤던 고레에다는, 영화 속의 좀도둑가족을 와해시키며 가족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 유사가족 해체의 주범은 기존의 시스템이다. 쇼타는 물건을 훔쳐 도망치다가 병원신세를 지게 되고 당국의 관계자들에게 추궁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좀도둑가족의 문제 있는 행동들이 탄로 난다.

먼저, 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것은 ‘유괴’의 범죄가 되고, 연금을 계속 지급 받고자 방바닥을 파헤쳐 수명이 다한 할머니를 묻은 행위는 ‘시체유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국은 이들 가족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아이들을 데려다 가족처럼 살았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의 삶에 무관심한 당국은 이들을 그저 범죄 집단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유리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학대했던 부모에게로 보내지고,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이 있는 합숙소로 향한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유사가족은 분해된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유리와 쇼타가 좀도둑 가족들의 품을 벗어났을 때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 역시 이에 대한 연출을 빠트리지 않는다. 유리는 여전히 부모의 무관심 속에 혼자서 놀고 있고, 합숙소를 나와 오사무와 함께 며칠 밤을 묶었던 쇼타는 합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내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레에다 히로가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한 울타리에서 함께할 수 있음을 제시했고, 이 유사가족이 세상과 시스템의 몰이해로 추락하는 이야기를 펼쳐냈다. 이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가즈는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 시대에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대영 /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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