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가리 요시타로와 ‘토기 융기문 발’

▲ 보존처리 하기 전과 한 뒤의 모습.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관장 정은우)에 가면 신석기시대 그릇 ‘토기 융기문 발’(위 사진)을 볼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센터장 이동식)는 색이 바래고 금이 간 ‘토기 융기문 발’을 앞으로 더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보존처리’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작업을 끝내고 이 그릇 한 점과 그간의 문화재 보존처리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주 색다른 전시회를 열고 있다. ‘보존처리 유물 공개전’은 12월 23일까지 이어진다.

 이 그릇은 일제강점기 1933년 부산고고회(1931-1941, 일본인 중심의 아마추어 고고학회) 회원 오마가리 요시타로가 부산 영선동 패총에서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산동 패총은 지금의 영도구 영선동 파출소가 있는 자리이다.

오마가리 요시타로. 오마가리 요시타로가 ‘토기 융기문 발’을 들고 있다. 그는 1905년 조선에 왔고, 여러 관청 일을 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두었다. 일본 패망 직전 1945년 6월 30일에는 부산도서관장직을 맡기도 했다.

 ‘토기 융기문 발’에서 ‘발(鉢 바리때발)’은 말 그대로 발우(바리때)를 말한다. 그릇 모양이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닮았다 해서 ‘발’을 붙인 것이다. 융기문(隆起紋 두터울융·일어날기·무늬문)은 ‘두텁게 일어나 있는 무늬’를 뜻한다. 하지만 이 명칭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보통 융기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인데, 이 그릇의 무늬는 저절로 융기한 것이 아니라 신석기인이 ‘일부러’ 흙띠(덧띠)를 붙여 ‘무언가’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융기문’보다는 ‘덧띠무늬’가 더 알맞다. ‘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근대의 관점으로 신석기 그릇에 이름을 붙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신석기인의 세계관 속에서 적절한 이름을 찾아 붙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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