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에서만 홍어를 먹었을까?

▲ 20세기 초엽의 영산포. 예로부터 영산포는 홍어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창구로 알려져왔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 제공>
 1950년대 말엽 광주에는 ‘기생집’이란 게 있었다. 그 무렵 광주시장은 지금 필자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북구 신룡동 출신이었다. 이 양반은 꽤 기개가 있었다는데 시장이 된 과정부터가 그랬다.

 1958년 치른 시장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이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부호를 누르고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그때 나이가 50대 초반이었다. 시장이 되고나서 새파랗게 어린 부하직원들과 곧잘 어울려 기생집에도 드나들곤 했다. 그들에게 술값 계산을 하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세상물정이란 일찍 배워두는 게 좋다는 배려에서였다고 한다. 사실이야 정확히 알기는 어렵겠지만 수년 전 필자에게 이 일화를 들려준 분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분명 그랬다고 한다.
 
▲기생집에서 박대 받은 홍어

 다음은 이 시장을 따라 기생집에 간 공무원이 본 광경이다. 방에 들어서자 술상이 걸게 차려져 있었다. 중국고사에 산해진미를 일컫는 ‘오후정’이란 말을 떠올리기에 딱 좋은 상차림이었던 모양이다. 1950년대는 기생집에서 조금만 비껴가도 보릿고개라는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술꾼들 가운데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시장의 눈엔 어디를 둘러봐도 홍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따라 들어온 기생들에게 “홍어가 어디 있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장의 노성에 화들짝 놀란 기생들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지만 이내 정색을 하며 “이런 데 오셔서 홍어를 찾으시면 어쩝니까?”라며 연신 시장을 달래기에 바빴다.

 당시 광주의 기생집이나 고급요릿집에서는 홍어를 상에 올리지 않았다. 관례였다.‘고약한 냄새’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어지간한 광주의 한정식 집에서 홍어를 내놓는 것과는 많이 다른 얘기다. 물론 광주에서도 홍어를 먹었다. 광주보다 더 내륙에 있는 지역에서도 그랬다.

그 시절 담양읍내에서도 삭힌 홍어보다 더 자극적인 홍어애국을 즐겼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그 소비량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홍어를 격조 있는 음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물전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파는 게 홍어였다. 홍어를 일러 전라도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라는 식의 말은 적어도 1950년대 광주에서는 전혀 사실과 들어맞지 않는 얘기였다.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실을 꿰맞추는데 꽤 능란하다. 필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익숙한 것에 대해 어느 날‘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16세기 기록, 전국적으로 홍어잡아

 홍어의 역사에는 우리의 통념과 다른 얘기들이 많다. 우선 옛날부터 전라도 사람들만 홍어를 먹었을 것이란 고정관념부터 따져볼 일이다.

 김주영의 소설 가운데 ‘홍어’가 있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이 작품의 작가는 경상북도 청송군이 고향이다. 가까운 항구라야 영덕군 강구항이 40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진 산골이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나 줄거리를 끌어가는 끈은 홍어다.

혹시 가오리를 홍어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심이 드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소설 속에서 한 말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사람들이 가오리라고 말하기도 하는 홍어였다.” 이 작품은 전라도 사람들만 홍어를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깨는 작은 증거다.

 그렇다 해도 혹시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화가 아닐까? 경상도 일부 지역민들이 상어를 소금에 절인 ‘돔배기’를 먹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홍어까지 먹었다는 게 영 믿기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그보다 먼 과거에도 과연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16세기에 이 땅의 지리정보를 담은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됐다. 이 책에는 전국에서 잡은 생선을 고을별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숭어와 함께 전국의 가장 많은 고을에서 잡은 것이 홍어였다.

 이 책을 보던 - 사실은 고전번역원의 웹사이트에서 훑어보던 - 필자가 더 놀란 것은 그 다음 대목이었다. 홍어를 잡는 지방을 보니 경상도 66개 고을 중 17곳, 평안도 42개 고을 중 13곳, 이런 식었다. 전국 334개 고을 중 홍어를 기록한 고을이 모두 59곳이었다.
 
▲홍어와 가오리, 뭉뚱그려 기록

 강구항이 있는 영덕군의 옛 지명 영해군도 지금은 대게로 유명하지만 당시엔 홍어도 열심히 잡았다. 의외로 전라도에서 홍어 잡이를 하는 고을은 적었다. 부안, 옥구(현재의 군산시), 무장(현재의 고창군) 세 곳에 불과했다. 아마도 전라도에선 잡는 생선의 종류가 워낙 많아 홍어를 기록할 지면이 부족해서였을지 모른다.

 물론 이 책의 기록에 의구심이 드는 구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홍어와 가오리를 구분하지 않았다. 아예 가오리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홍어와 가오리를 같은 것으로 보고 뭉뚱그려 홍어라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내용 중 어느 지방에서 잡은 가오리를 홍어로 잘못 기록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경상도에서 잡은 진짜 홍어를 홍어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20세기에는 어떠했을까?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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