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와 전라도(2)

▲ 영산포의 옛 부두 위로 홍어거리가 보인다.

 인천 시내에서 월미도로 가다보면 학익동이란 동네를 지난다. 이곳에는 나주 영산포처럼 ‘홍어거리’가 있다. 홍어음식을 파는 집들이 밀집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조개를 팔던 곳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엽 충남 대천 사람들이 홍어무침을 만들어 팔면서 홍어거리로 변했다고 한다.

 홍어 파는 곳이 인천 학익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금강 일대에서도 홍어는 낯선 음식이 아니다. 논산 강경포에서도 홍어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전라도 밖에서 홍어 먹는 풍습이 생긴 게 비교적 최근에, 그것도 국지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이미 홍어 잡이가 서해안을 중심으로 널리 행해졌고 동시에 전라도 밖 많은 지역에서 홍어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꼭 이런 생각이 맞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전라도처럼 홍어를 삭혀 먹는 문화는 흔치 않다. 그렇다고 홍어를 삭혀 먹는 것이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방법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으므로 홍어를 먹는 문화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홍어 살이 넉넉해 국을 끓이기 좋다” 기록
 
 일반적으로 홍어를 먹는 법은 지금처럼 삭혀 먹는 것을 포함해 회 중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세기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보면 당시에도 나주 사람들이 삭힌 홍어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지만 주로 익혀먹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17세기 경기도 사람 이응희는 ‘홍어’라는 시에서 “홍어 살이 넉넉해 국을 끓이기 좋다”고 했고 ‘증보산림경제’에는 “칼로 살을 납작하게 저며 된장 물에 삶아먹는다”고 했다.

 회나 무침으로 먹으려면 홍어는 선어(鮮魚) 형태로 거래됐을 것이다. 일제강점 직전인 1900년대 일본인들이 목격한 것에 따르면 충청도 강경포 같은 곳에서 홍어는 선어 형태로 거래됐다. 그러나 평안도 의주 인근인 용암포에서는 소금에 절여 거래됐다. 소금에 절였다는 것은 날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홍어하면 떠오르는 흑산도는 홍어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먼저 전라도 사람들이 먹는 홍어의 상당수가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 어획된 것이란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이것은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해 온 홍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에도 전라도보다 그 바깥 지역에서 더 많은 홍어를 잡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어획량 통계는 홍어와 가오리를 구분하지 않고 ‘분어’라는 한자이름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해 정확히 얼마만큼의 홍어가 어느 지역에서 어획됐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홍어의 최대어장이 군산의 어청도,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나 대청도 근해였던 것은 분명했다.

 홍어와 가오리 어획량을 명확히 구분해 통계를 잡은 것은 1960년대다. 그런데 그 무렵 전남의 홍어 어획량은 경기, 충남, 전북보다 낮았다. 1960년 전남에서 200톤의 홍어를 잡는 동안 전북에서는 900톤, 경기와 충남에서는 각각 300톤의 홍어를 잡았다. 전북에서 잡은 홍어의 상당량은 군산 어청도에서 어획된 것이었다.
 
최대어장 군산 어청도, 인천 옹진군
 
 또 1967년 전국 홍어 어획량 2500톤 중 경기도에서 1000톤, 부산과 경남에서 880톤, 전북에서 350톤을 잡았는데 전남 어획량은 100톤에 불과했다. 이들 통계 수치는 당시에 작성한 ‘수산통계연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아쉽게도 1970년대부터는 홍어의 어획량이 급감해서인지 ‘수산통계연보’는 홍어와 가오리를 합쳐 ‘가오리류’로 묶어 통계를 내는 바람에 지역별 홍어 어획량을 산출해내기가 어렵다.

 여하튼 1960년대 흑산도 홍어가 전남 사람들의 입맛에 맞았는지는 몰라도 어획량으로 보면 흑산도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영산포에 들어온 대부분의 홍어가 흑산도 근해에서 잡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연평도 등지의 어부들이 잡은 홍어를 직접 영산포까지 배에 싣고 왔다는 증언도 많다.

 한편 광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홍어를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직 영산포에 홍어 배가 들어오던 1970년대에 나주 인구는 20만명이었다. 그런데 20만명을 겨냥해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연평도 어선들이 몰려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은 영산포 너머의 더 큰 소비시장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인구 70만명에 육박하는 광주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시절 연평도 등지에서 잡은 홍어의 80%는 광주에 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광주의 양동시장 근처에는 수산물도매시장이 있었다. 이곳이 전국에서 몰려온 홍어가 광주시내와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관문이었던 것 같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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