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용 옷감·귀한 먹을거리 ‘물물교역’

 사진은 명태와 무명실이다. 명태는 어디에서 잡힌 것인지 알 수 없고 무명실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살 때 원산지를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둘의 조합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 됐다. 운전자들의 상당수가 둘을 묶어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기 때문이다.

 첨단 옵션이 장착된 수천만원짜리 승용차를 타건, 그 운전자가 역시 첨단 스마트폰을 사용하건 관계없이 명태와 무명실의 조합은 단순한 먹거리나 공산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언제부터 ‘차고사’를 지낸 뒤에 트렁크에 넣고 다니는 물건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전부터 둘을 묶어 고사를 지내는데 사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 시작이 18~19세기 이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무명실의 원료인 목화는 고려시대 말엽부터 재배됐다. 명태는 그 존재가 알려진 시기에 대해 말이 많지만 18~19세기부터 전국적으로 소비됐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명태와 무명실타래가 하나의 조합으로 사용된 것은 아무리 일러도 18세기보다 더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명태·무명실타래 조합은 언제부터?
 
 그런데 명태와 목화의 산지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목화는 주로 전라도 등 남부지방에서만 재배됐다. 당시 사람들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 등 북부지방에서는 목화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목화가 중요한 의복재료였던 까닭에 여러 차례 목화 재배지역을 이들 북부지방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성종실록 6년 4월 27일자).

 이런 시도에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특히 함경도에서 그랬다. 16세기에 정부는 기후조건 때문에 도저히 함경도에서 목화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밀과 보리 재배단지로 만드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해야 했다(중종실록 11년 1월 22일자).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추운 함경도 사람들은 뭘 입고 겨울을 보냈다는 말인가? 조선시대 함경도 사람들의 의복 수준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 이하였다. 겨울에도 삼베옷을 걸쳤고 여기에 개나 오소리 가죽으로 지은 옷을 덧입었다. 이불 같은 침구류에 들어갈 솜도 목화솜을 구하기 어려워 부들 꽃이나 갈대꽃을 넣어 만들었다(영조실록 5년 5월 6일자, 고려대학교, 한국민속대관 2, 1982, 324쪽).

 물론 17세기 기록을 보면 함경도 남부지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목화 재배를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양은 많지 않아 지역 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헌종개수실록 5년 1664년 1월 29일자). 결국 함경도 사람들은 전라도 등 남부지방에서 목화를 구해야만 했다.

 전라도 목화와 무명베는 경상도를 거쳐 함경도로 갔다. 대한제국시절에 함경도에서는 연간 30만~40만필의 무명베가 소비됐는데 그 대부분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짠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08년 목포항을 통해 나가 함경도의 관문 원산항에 도착한 상품 중 가장 많은 것은 쌀이었고 그 다음이 목화였다(관세국, 융희2년 한국 외국 무역요람, 1909, 443~444쪽). 명태 잡이의 본산인 성진항에 들어온 물품 중 가장 많은 것은 목화와 그 제품이었고 그 다음이 쌀이었다. 목화와 그 제품은 주로 부산항을 거쳐 온 것이 많았지만 일부는 목포항에서 논스톱으로 온 것도 있었다((융희2년 한국외국 무역요람, 108쪽).
 
▲교역서 더 명운 건 건 함경도
 
 반대로 같은 해 목포지역의 창고에 입고된 상품 중 가장 많은 것은 쌀이었고 그 다음이 명태였다(융희2년 한국외국 무역요람, 449쪽). 전라도는 목화를 건네고 함경도는 명태를 팔아서 서로 교역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 교역에서 더 절실한 입장에 있었던 쪽은 함경도였던 것 같다. 그곳 사람들은 식량 아니면 목화 확보에 명운을 건 사람들 같았고 이를 이용해 객주들은 돈을 벌었다. 1915년 조사내용을 보면 객주들은 무명베와 좁쌀 등 생필품을 시가의 20~30%나 되는 높은 가격으로 명태잡이 어민들에게 빌려주었다. 그리고 겨울 명태어획기가 되면 시가의 20~30%나 싼 가격으로 명태로‘대출금’을 환수했다(조선총독부, 조선휘보 1915년 5월호, 70~78쪽).

 예나지금이나 명태는 전라도에서 잡히는 생선이 아니다. 전국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생산하던 목화도 지금 전라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러나 아주 긴 시간은 아니지만 둘은 전라도 문화의 한 요소로 만났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모든 지역문화의 본질이 아닐까? 지역문화는 결코 그 지역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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