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생충 한 장면.
영화 기생충, 영어로는 ‘파라지트’(parasite)을 보았다. 칸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니 그 영화제 출품명 그대로 쓰는 게 어떨까 해서 제목으로 쓴다.

기생충은 말그대로 하면 기생하는 숙주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숙주 몸 어딘가에 숨어서 평생을 아니, 대를 이어 사는 생물이다. 따개비처럼 그냥 조용하게 붙어 살아갈 수도 있지만 진드기나 이처럼 숙주를 무척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숙주를 괴롭히는 것은 기생충들의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다. 기생충은 어떻게든 숙주에서 오래 살아남아 생을 이어가는 게 목적이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니 숙주를 기생충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충실한 기생충은 때론 공생처럼 숙주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첫째는 공진화(같이 진화)라는 것이다. 생활사가 짧은 기생충이 숙주 몸이 원치 않는 일정범위 이상으로 진화하면굚 숙주의 면역 시스템이 이를 감지해 기생충이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또 다시 작은 진화를 거듭한다.

▲“서로 경계하며 조금씩 진화”가 섭리

기생충 역시 숙주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금 더 진화한다. 이런 관계를 예전엔 나쁜 관계로 인식되었지만 요즘은 순진화를 촉진시키고 면역계를 활성화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에 더 주목하고 있다. 이런 기전은 내인성 질환인 아토피나 종양발생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연구되고 있다.

만성 아토피 환자에게 일부러 기생충을 감염시키는 치료가 가능한 이유이다. 기생충이 없으면 과잉된 영양분이 비만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한때 다이어트 용도로 일부러 촌충을 감염시키기도 했다. 흡혈하는 기회기생충인 거머리는 고질적인 상처치유에 쓰이기도 한다.

이들은 숙주에게 거의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과잉 영양분이나 항생제로 치료하기 힘든 상처들을 감쪽같이 치유하기도 한다. 현대의 증가하는 아토피나 종양을 기생충이 없어져서 생긴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자연하고 격리된 인간의 너무나 깨끗하고 완벽한 삶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왜 제목이 ‘기생충’일까 궁금했다. 아마 범죄자들을 흔히 비하하는 말로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표현하듯 그런 저속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마 그런 영화를 만들었으면 칸의 주목을 받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나 외국 영화 중에 그런 범죄 영화들은 차고 넘쳐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비록 비루하긴 하지만 범죄자들은 아니다. 남들을 속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귀여울 정도고 오히려 당하는 사람에게 딱 원하는 도움을 준다. 그러니 범죄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돈 들여 잘 만든 블록버스터도 아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에서 보듯 봉준호 감독은 얼마든지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의 독립영화급이라 할 만큼 두서너 개의 좁은 공간에서 오직 배우들의 연기력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유명 배우들만 빼면 저 예산으로 만들어 졌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랬다간 칸은 진출도 못했고 지금처럼 개봉관도 거의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엔딩자막이 오르기도 전에 거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떨떠름하게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영화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영화제로는 성공했지만 영화로는 실패한 것일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영화는 별로지만 별로라고 말하면 자신이 별로가 되는 영화제를 위한 영화일까?

▲기생충과 숙주, 공진화 생태계

제목을 정하고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를 만들고 나서 이 제목을 붙였을까? 한참 왜?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추상적인 것 같은 제목으로 돌아갔다. 냄새, 음지, 반 지하, 지하실, 숙주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기막히게 이 제목에 충실하다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부자 집과 가난한 집, 두 집의 식구들이 있는데 부자 집에 가정교사로 운전사로 식모로 들어온 가난한 집 식구 전부가 바로 ‘기생충’들이고 그리고 부자 집 식구들이 은연중에 그들을 먹여 살리는 ‘숙주’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화된 기생충이 주제를 모르고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우리 몸 안에 있을 때 절묘한 면역균형 상태를 유지하며 때론 도움도 주는, 2m가 넘는 촌충과 희멀그래한 회충는 밖으로 나오면 흉측한 오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기생충은 절대 자기 모습을 스스로 내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평화는 깨지고 만다. 그래서 밖으로 억지로 나오면 땅속이든 물속이든 깊이 숨어들어야 겨우 목숨이라도 유지하고 다음에 올라 탈 숙주를 기대할 수 있다.

만일 영화처럼 기생충이 발동하여 숙주를 죽여 버리면 거의 자멸하는 셈이다. 조금이라도 기생충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목과 영화를 함께 곱씹으면 씹을수록 기막히게 생물사를 인간사에 접목시킨 지적이고 철학적이 수작이 돼버린다. 그러니 먹물과 자만심으로 가득한 칸 평론가들이나 심사위원들에게 이 영화는 지적 도전을 걸었고 이겨버린 것이다.

변기가 작품이 되듯 현대예술은 꿈(비평)보다 해몽이다. 어쩌면 심사위원이나 관객들마저 몽땅 몽상 속에 빠진 기생충이 되어 버린 지도 모르겠다.
최종욱 <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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