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균열의 세계

▲ 영화 ‘벌새’.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는 복고 열풍을 주도했다. 이들 시리즈는 80·90년대 당시의 대중문화와 로맨스를 적절하게 직조해내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시대를 낭만적으로 접근하며, 현실 회피 심리에 기초한 과거 우려먹기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벌새’역시 1994년을 되살려내고 있기에 ‘응답하라’ 시리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벌새’가 포착하고 있는 시대의 공기는 ‘응답하라’ 시리즈와는 결이 다르다.

 ‘1994년, 서울’을 드러내기 위해 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은 미시사(微視史)다. 그러니까 거시적인 역사쓰기가 아니라 ‘개인’을 깊게 드려다 보는 방법을 통해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벌새’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일상을 열심히 따라간다.

 먼저 은희의 가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희네 가족을 굴러가게 하는 시스템은 한마디로 말해 ‘가부장제’다. 은희 가족은 가부장제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다. 오빠에게 두들겨 맞은 은희가 식사 자리에서 오빠가 자신을 때렸다고 말했을 때, 아빠와 엄마는 오빠를 나무라는 대신에 싸우지 말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며 아들을 감싼다. 은연중에 남아선호사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묵과는 후에 부모가 보는 앞에서 오빠의 폭력이 재차 자행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은희네 가족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집안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집안이다. 이 상황에서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난 은희는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은희가 아파트 현관문을 두들기며 엄마! 하고 외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낯설고 두려운 감정이 연출되는 영화의 오프닝은 소통 불능을 시각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은희가 다니는 학교라고 다르지 않다. ‘날라리’를 색출한다고 쪽지에 급우 두 명의 이름을 써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노래방 말고 서울대 가자!”를 외치도록 훈육하는 교육 방식은 개인의 장점을 발굴해 주기보다는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주문이다.

 이렇게 가족과 학교의 억압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은희는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단짝 친구와 콜라텍을 가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1학년 후배와도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공들여 연출한다. 그렇게 은희는 가깝게 지내던 이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영화 ‘벌새’.|||||

 은희의 한문선생님인 김영지(김새벽)만 해도 그렇다. 은희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고, 은희에게 “누구라도 널 때리면 가만히 잊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말했던 김영지는 홀연히 은희 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새’는 은희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단절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벌새’가 이렇게 서사를 구축한 이유는, 은희가 맞닥뜨리는 관계의 불연속성과 1994년 10월 21일 발생한 성수대교의 물리적 단절이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은희가 보고 듣고 경험했던 1994년은 균열의 세계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고 부조리했다. 그리고 그 균열의 기미는 결국 성수대교 붕괴로 드러났다. 이렇듯 ‘벌새’는, 한 개인이 느끼는 불통의 기운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고, 그것이 한강다리가 무너진 것의 전조였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1994년 서울이라고 하는 시공간을 탁월하게 구현해 낸 화면 속에 은희의 감수성을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는 정성가득한 시대의 공기는 은희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1994년의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애정 역시 남다르다. ‘벌새’는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벌새’는 영화적인 장점이 많은 영화로, 올해의 데뷔작을 예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조대영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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