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승평부사 최석의 비서랑 전임 시 주민들이 관례에 따라 말 8필을 주었고, 최석은 부사 재직 당시 본인의 말이 낳은 망아지를 합해 9마리를 되돌려 주었다’라고 기록됐다. 백성들이 바친 말을 되돌려 준 고려 말의 청백리 최석(崔碩)을 기려 순천에 선정비가 세워졌고 순천팔마비(順天八馬碑)라고 부른다.

 선정비(善政碑)는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을 말하며 불망비(不忘碑)라고도 한다. 선정비 또는 공덕비는 관리들의 공덕을 찬양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것이다. 하지만 탐관오리 조병갑과 친일파 윤웅렬, 이근호 등은 본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본인이 공덕비를 세웠다.

선정 베푼 관리에게 주민들이 세워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태종(3대)의 후궁에서 태종의 아들인 고종(4대)의 황후가 되었다. 자신의 3남인 중종(5대)과 4남인 예종(6대)을 차례로 폐위하고 자신이 7대 황제로 즉위하여 15년 동안 당나라를 통치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 많아 비석에 모두 기록할 수 없으니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유언하여 글씨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남겼다.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판서(判書)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碑)를 세우는 일은 하지 말라’라고 박수량은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명종은 박수량의 부음 소식을 듣고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라며 비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백비(白碑)라고 부르게 하였다. 백비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여절(狐寺) 마을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하 박수량은 임금 명종으로부터 백비(白碑)를 하사받았다.

 박수량은 전남 장성 출신으로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종2품 함경도관찰사와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정2품 형조판서와 우참찬 등을 지냈다. 박수량은 56세와 61세에 두 번이나 청백리에 뽑혔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온 박수량은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청백리라고 한다.

 155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재직 중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제문에 ‘속은 실상 유여(有餘)하나 겉으로는 부족한 척, 집엔 남은 곡식 없으니 더욱 아름답고 애석하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박수량의 집이 곤궁하여 장사를 치를 수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일로(一路)에 관인(官人)들로써 호송케 하고 제사 비용을 지급하라’라며 장례비를 하사했다.

황희·맹사성과 조선 3대 청백리 불려

 순조는 박수량이 사망한 지 300년이 지나서야 시호 정혜(貞惠)를 하사했다. 박수량의 백비의 오른쪽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송병선(宋秉璿)이 비문을 짓고 일제에 항거하여 쓰시마 섬에서 자결한 최익현(崔益鉉)이 글을 쓴 박수량신도비(朴守良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왕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신도비는 왕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인물의 무덤에 세운 석비를 말한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요즘의 정치 현실에서 박수량 같은 백성을 위하는 청렴한 공직자가 아쉽기만 하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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