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金千鎰)은 1537년 전라도 나주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인후(金麟厚)와 유희춘(柳希春)과 교유했다. 36세의 나이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무기를 제조하고 관리하는 종6품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로 벼슬을 시작하여 강원도사와 경상도사를 역임했다. 정5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재직하며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종6품 임실현감으로 좌천됐다. 다시 종4품 담양부사로 복직하여 한성부 서윤과 수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은 55세의 나이에 전라도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창의기병(倡義起兵)을 촉구하여 고향 나주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300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출병하여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쳐 관군들과 함께 강화산성(江華山城)으로 들어갔다. 의병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장례원 판결사(掌禮院 判決事)에 제수됐고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2차 진주성 전투서 아들과 순국

 의병장 김천일은 경기수사, 전라병사, 충청병사, 의병장 우성전 등과 함께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김천일은 의병들과 함께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이끈 관군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물리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권율은 행주대첩의 승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국 팔도의 지방군을 지휘하는 정2품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했다. 김천일은 남쪽으로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했다.
 왜군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진주성 공격을 준비했다. 진주성에 남아 있는 장수들이 김천일을 관군과 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추대했다. 10만에 가까운 왜군들이 대공세를 감행하자 관군과 의병은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은 함락됐다. 도절제사 김천일을 비롯해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또한 의병장 김천일의 아들 김상건과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도 함께 순절했다.
 촉석루에서 순국한 도절제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 3인을 ‘삼장사(三壯士)’라고 한다. 최경회의 부실(副室)인 논개는 2차 진주성전투의 승전축하연에 참석하여 왜장을 안고 투신했다. 진주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고 촉석루는 진주성 남강(南江)의 바위 위에 세워진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머리카락·손톱·발톱으로 묘를 써

 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과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관군과 의병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전투이다. 1차진주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꼽힌다. 2차진주대첩은 1593년 6월 왜군이 1차진주대첩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공격하자 끝까지 항전을 하였으나 전원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왜적이 물러가자 김천일의 차남 김상곤이 진주성에 찾아가서 머리카락, 손톱, 발톱을 가지고 와서 고향 나주에 초혼 묘를 썼다. 정유재란 당시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계요총독’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형개는 ‘충성스러운 혼과 씩씩한 넋이 늠름해 살아 있음과 같다’고 김천일을 극찬했다. 김천일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추증되고,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이 가증됐다. 나주의 정열사, 진주의 창렬사, 순창의 화산서원, 태인의 남고서원, 임실의 학정서원 등에 배향됐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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