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은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인 최부(崔溥)가 명나라에 체류하며 기록한 표류기(漂流記)이다. 조선의 선비 최부의 ‘표해록’은 명나라 전기의 정치·경제를 비롯해 풍습·교통·언어 등을 섬세하게 기록했다. 조선의 선비 최부가 남긴 ‘표해록’은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를 방문하고 기록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엔닌(円仁)이 당나라를 방문하고 기록한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부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 사람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었다.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수학하고 벼슬을 시작했고 알성시와 중시에 합격하여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정5품 홍문관 수찬과 홍문관 교리를 비롯해 노사신(盧思愼)과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서거정(徐居正)과 역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했다.

나주 출신, 풍랑으로 제주서 중국으로 표류

 최부는 도망 간 유민이나 죄인들을 조사해서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갔다. 이듬해인 1487년 부친상을 당하자 배를 타고 고향인 나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최부를 비롯해 배에 함께 탑승했던 42명의 일행은 명나라 저장성(浙江省)으로 표류하다가 붙잡혀서 왜구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부는 조선의 관원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명나라 관리들의 호송을 받아 항저우(杭州)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이동했다. 최부 일행은 강남과 강북을 잇는 1800km 대운하를 지나 명나라 9대 황제 홍치제(弘治帝)를 접견하고 조선으로 환송됐다. 최부는 명나라에서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부친상의 예와 윤리를 다하였다.

 조선에 도착하여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으나 9대 임금인 성종의 어명으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여행기를 작성했다. 제주도에서 명나라에 표류하여 베이징을 거쳐 요동을 지나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섯 달 동안의 8800여 리의 여정을 기술하여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내관은 단지 궁중의 청소나 심부름에만 종사할 뿐 공적인 업무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다. 벌써 환관들이 저리 난리를 치니 나라꼴 잘 돌아가겠다’며 최부는 표해록에 명나라 환관들의 정치 참여를 비판했다. ‘모두 농업을 미루고 상업만을 직업으로 삼으니 높은 벼슬이나 문벌이 있는 사람도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조그만 이익까지도 챙긴다’고 최부는 표해록에 명나라의 풍습을 기록했다.

6개월 동안 8800여 리의 여정 기록

 최부는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부친상 중에 한가롭게 기행문을 썼다는 이유로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최부는 부친상에 이어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지냈다. 최부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을 거쳐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하는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다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다녀왔다.

 연산군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최부는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 연산군이 다시 폐비 윤씨 폐출을 빌미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최부는 연산군의 지시로 유배된 지 6년 만에 단천에서 참형을 당했다. 최부는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어 정3품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됐다.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목판 인본(印本) 3권 2책의 한문본과 3권 3책의 국역 필사본이 전해진다.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에서 출판되어 명나라 연구에 널리 활용됐다. 영조 때 일본 유학자 세이타 겐소가 ‘금남표해록’을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로 간행했고 ‘통속표해록(通俗漂海錄)’으로 재간행했다. 최부는 51세의 나이에 처형을 당했지만 그의 ‘금남표해록’은 아직도 소중한 역사자료로 칭송을 받고 있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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