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시작돼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다. 당시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의 60%에 해당하는 5만4000명이 참가해 194개 학교에서 1462명이 구속을 당했고 2912명이 퇴학 및 무기정학을 당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6년 4월25일 의문의 죽임을 당한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6·10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15일 이상재, 김병로 등 민족주의자들과 허헌, 홍명희 등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 단체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했다.

 한편 1926년 11월 광주고보와 광주농교를 중심으로 학생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했다. 성진회를 독서회로 개편하고 광주여자고보, 광주사범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8년 6월 광주고보 재학생인 이경채가 항일 격문을 뿌리다가 구속되자 5개월 동안 동맹휴학을 하였다.
 
▲11월3일 광주서 대규모 항일운동 시작
 
 1929년 10월30일 일본인 광주중학교 후쿠다(福田修三)가 조선인 광주여자고보 박기옥(朴己玉)을 희롱하자 광주중학생들과 광주고보생들이 집단으로 싸움이 일어났다. 11월3일은 음력 10월3일로 조선인에게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고 일본인에게는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었다.

 11월3일 명치절 행사에 강제로 참석하고 돌아온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다시 충돌이 있었다. 소식을 들은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1차 가두시위를 하였다. 11월12일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 등의 학생들이 조선독립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2차 가두시위를 하였다.

 신간회는 진상조사위원을 광주에 파견하여 광주 학생들의 항일시위의 진상을 보고했다. 신간회는 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12월3일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했다. 일제는 허헌, 한용운, 조병옥, 김병로, 권동진 등 신간회 간부 90여 명을 구속하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중대회를 무산시켰다.
 
▲서울·평양·일본·중국·미국 등 확산

 일제가 경찰과 헌병을 앞세워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탄압하자 광주에서 목포, 나주, 함평, 전주, 이리 등으로 번졌다. 다시 서울의 경신학교, 보성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협성실업학교를 비롯해 전국적인 동맹휴업과 학생시위로 확대됐다. 또다시 부산, 대전, 평양, 함흥, 신의주 등 전국으로 확산됐고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해외까지 확산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학생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1월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1973년 ‘학생의 날’을 폐지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1984년 ‘학생의 날’을 부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다시 법정기념일인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지정했다. 지난 2019년 11월3일 제90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이 개최됐다.
서일환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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