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金性洙)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김인후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장인 고정주가 전남 창평에 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입학해 송진우를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김성수는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송진우와 함께 일본(日本)으로 건너갔다.

 김성수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되어 ‘교유계몽운동’을 추진했다. 또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방직회사를 인수하여 조선인 최초로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섰다.

 

동아일보 창립해 민족정신 고취

 3·1운동을 준비하던 중에 밀정의 밀고로 송진우는 투옥됐고 김성수도 체포됐다. 김성수는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동아일보의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판매와 배포의 금지를 비롯해 기사 삭제, 압류,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이사직에서 사임을 당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복간된 동아일보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는 글을 올렸고 총독부가 주최한 ‘시국강연대’에 참가하여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였다.

 

 친일파로 변절 역사에 오명 남겨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는 글을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자에 실었다. 또한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라는 글을 매일신보 1943년 11월6일자에 실었다.

 하지만 김성수는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귀족원 작위를 거절했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초대 정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과 이시영이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1년 이시영이 이승만의 독재에 항의하며 사퇴했다. 김성수는 1952년 제2대 부통령 보궐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악하자 1952년 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김성수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며 싸우다가 1955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또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수록됐다.

 김성수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 그리고 친일행적으로 칭송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역사는 김성수의 독립운동과 친일운동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평가해야 한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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