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李址鎔)은 전라도 전주 출신으로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영의정 이최응의 손자이자 예조판서 이재긍의 아들이다. 흥선대원군은 4촌인 종조(從祖)이며 고종 황제는 5촌 당숙(堂叔)이 된다.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 안주목사,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고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다시 황해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종2품 궁내부협판으로 승진했다.

 이지용은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았고 외부대신 서리 자격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로부터 뇌물 1만 엔을 받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하고 대한제국을 일제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조인하여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이지용, 을사조약에 앞장서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며 앞장서자 격앙된 군중들은 이지용의 집에 방화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다시 최고 훈장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고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이지용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경상도 진주에 가서 기생 산홍에게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애원하였다고 한다.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거부하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한일병탄 조약 체결 후에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제3등위 백작 작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막대한 하사금을 받았다.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사공채 10만 원을 도박에 탕진하여 태형(笞刑) 100대를 선고받고 귀족 예우가 정지됐고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됐다. 끊임없는 친일행적으로 다시 작위가 회복됐고 중추원 고문으로 재임명됐다.

 

 다시 한일합방 조약에 앞장서다

 이지용의 배우자 이옥경(李鈺卿)은 본래는 홍씨이나 일제의 풍습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랐다. 일본 애국부인회가 조선의 상류사회 부인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친일여성단체의 부회장이 되어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이지용은 아들에게 ‘내가 보기엔 미국이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라’라고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선정됐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어 이지용의 재산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장성출신 기산도, 보성출신 나인영, 강진출신 오기호 등이 결성한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에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했다. 이지용을 비롯한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 하며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민족반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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