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세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황희,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의 후손이다.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나서 구례에서 성장했다.

 황현은 서울로 유학을 와서 한말의 문장가 이건창과 김택영과 교유했다. 황현은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한말3재’로 평가받고 있다. 황현은 생원시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합격이 취소되었다. 복시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부정비리로 얼룩진 현실을 개탄하고 벼슬을 포기하고 구례 만수동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이건창·김택영과 `한말3재’ 평가

 이건창(李建昌)은 조선에서 최연소인 15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경기도 암행어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낙향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여 조선후기 사회 당쟁의 폐단을 지적했다.

 김택영(金澤榮)은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순서에 따라 기록한 ‘동사집략(東史輯略)’을 저술했다

 황현은 구례 만수동 초가집에 매화나무와 오동나무를 심고 세상과 단절하며 은둔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며 ‘문변삼수’를 짓고,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순절한 민영환 등을 애도하며 ‘오애시’를 지어 망국의 한을 표현했다. 황현은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설움을 통탄하며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를 남기고 구례의 자택에서 순국했다.



조선 멸망하 절명시·유서 남기고 자결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 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지껏 그러지를 못했어라.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악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보니 인간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황현이 남긴 절명시의 1수와 2수이다.

 ‘내가 가희 죽어 義(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오백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황현이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장지연(張志淵)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올렸다.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했고 장지연을 구속했다. 장지연은 합방조약이 체결되자 황현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올렸다. 경남일보는 정간됐고 장지연은 사임됐다.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등 저술

 황현은 외세의 침략과 백성들의 저항을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일제침략과 항일의병활동을 기록한 ‘오하기문(梧下記聞)’,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동비기략(東匪紀略)’ 등 수많은 저서를 편찬했고 3,0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택영은 황현이 남긴 애국지사들의 우국충정과 간신들의 작태를 고발하는 ‘매천집’을 간행했다. 1962년 후손들은 황현이 순국했던 구례 만수동 집터에 사당 매천사를 세우고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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