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즉위하여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역모혐의로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 뒤 처형했다. 다시 광해군은 동복친형 임해군을 역모죄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냈고 다시 전라도 진도로 이배를 보냈다. 허균의 후손이자 임해군의 처조카인 허대(許垈)가 임해군을 수행하여 진도에 왔다가 역모를 피해 진도에 정착했다.

운림산방(雲林山房), 남종화의 산실

 허련(許鍊)은 허균의 후예이자 진도에 정착한 허대의 후손으로 남종화를 정착화시킨 선비화가이다.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화풍을 익혔고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추사 김정희를 소개받아 글을 배웠다. 허련은 헌종이 직접 주관하는 무과에 급제하여 종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허련은 김정희가 사망하자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첨찰산 아래에 운림산방을 짓고 죽을 때까지 그림에 몰두했다. `첨찰산 자락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붙여졌다. 운림산방의 운림지(雲林池)에는 흰색 수련이 피어 있고 가운데 섬에는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토해낸다.

 소치(小痴) 허련(許鍊)과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 3대가 운림산방에서 남종화풍을 토착화시켰다. 허련의 방계(傍系)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이 운림산방에서 남종화를 꽃피웠다.

 허백련은 해방 직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무등산 새인봉 아래 차밭을 인수하여 차밭 아래에 춘설헌(春雪軒)을 짓고 30여 년간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전통차의 재배와 보급에 노력했다. 춘설헌은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증심사(證心寺) 입구에 위치한 건축물로 1986년 9월 29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허백련, 춘설헌서 30년 동안 활동

 춘설(春雪)은 송나라 시인 나대경이 `한 사발 춘설차 우려 맛보니 제호보다 좋구나’라는 뜻의 `일구춘설승제호’의 싯구절에서 따왔다. 제호는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오미 중에서 맛이 가장 뛰어난 것을 말한다. 나대경(羅大經)은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으로 말직에 있다가 탄핵을 받아 여생을 은둔하며 산문 `산정일장(山靜日長)’ 등을 남긴 시인이다.

 허백련(許百鍊)은 진도군 출생의 화가이며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허련(許鍊)의 아들 허형(許瀅)에게서 묵화의 기본화법을 익혔다. 진도보통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이 구타하자 항의하고 자퇴 후에 상경하여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설립한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입학했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고무로(小室翠雲)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허백련은 21세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1922년 제1회 조선전람회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가 수석상을 받았다. 29세에 광주로 내려와서 전국을 유람하며 후학양성과 문인화의 중흥에 힘썼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와 초대작가가 추천됐다.

 명나라 말기부터 문인들의 그림인 수묵산수화 중심의 남종화(南宗畵)와 화공들의 그림인 채색산수화 중심의 북종화(北宗畵)로 구분했다. 허백련을 남종화의 맥을 이은 대가로 평가하고 김은호를 북종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한다. 무등산 증심사 입구의 춘설헌에서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인 허백련을 만날 수 있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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