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제(李先齊)는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고려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정3품 밀직제학 이홍길(李弘吉)의 손자이고 국방을 담당하던 종2품 병조참판 이일영(李日英)의 아들이다.

 이선제는 개국공신이자 대제학을 역임한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서 20여 년을 활동하여 태종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이선제,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

 세종 12년인 1430년 광주에서 노비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자 광주목(光州牧)은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됐다. 이선제는 문종에게 상소하여 무진군(茂珍郡)을 광주목(光州牧)으로 복귀했다.

 이선제는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회복하자 ‘단비의 화한 바람 이 해가 풍년인데 뚜렷한 밝은 일월 하늘에 솟았구나. 위 아래 임금 신하 서로 즐거하고 동남의 어진 빈주 떼지어 보았도다.’라고 시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8도 밑에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행정조직으로 편제됐다. 목(牧)은 정3품 목사를 파견하여 군현을 관리했고 군(郡)은 종4품 군수를 파견하여 속현을 관리했다.

 이선제는 종3품 예조참의로 재직 시에는 어염세(魚鹽稅)를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을 요청하는 이재소(理財疏)를 세종에게 상소했다. 종2품 강원도관찰사, 종2품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고 문종이 즉위하자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종2품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문종이 즉위하자 서북지방의 군제 정비 야인의 객관(客館)을 별도로 둘 것을 요청하는 군재소(軍財疏)를 상소했다. 단종이 즉위하자 경창부윤으로 의생(醫生)를 선발하고 교육시켜 양의(養醫)를 길러내자는 시의소(試醫疏)를 상소했다.

 이선제는 세종 때 초하루에 황제를 알현하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단종 때 명나라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伴送使)로 임명되었으나 갑자기 한양에서 사망하자 상여로 고향으로 옮겼다.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이선제의 부조묘와 신도비가 남아 있다. 부조묘(不?廟)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인물의 무덤에 세운 석비이다.

 광주광역시는 이선제를 기리기 위해 1988년 거리명으로 필문로를 지정했다. 필문로는 남광주사거리부터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사거리까지 도로이며 정충신 장군을 기리는 금남로와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로와 더불어 중요한 도로이다.

왕버드나무 심고 과거 급제자 알려

 이선제가 왕버들 나무를 직접 심고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할 터이니 관리를 잘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두고 잔치를 하여 괘고정수(掛鼓亭樹)라고 부른다.

 이선제를 시작으로 두 아들인 이시원과 이형원, 이형원의 아들 이달손, 이달손의 아들 이공인, 이공인의 아들 이중호,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합격하여 북소리를 울렸다.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 이길 형제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여 이선제의 저술은 모두리 소각됐고 왕버들 나무마저 싹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세기 만에 이발과 이길 형제가 무죄로 신원되자 다시 왕버들 나무에 싹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령 600년 된 노거수가 이선제와 이발, 이길 형제의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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