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1품 좌찬성에 추증된 박지흥(朴智興)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염증을 느껴 처가인 광주에서 은거하며 아들 셋을 낳고 장남이 23세가 되자 사망했다. 장남 박정(朴禎)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다가 32세에 요절했고, 차남 박상(朴祥)은 정3품 나주목사를 역임했고, 삼남 박우(朴祐)는 종2품 대사헌을 역임했다. 송나라의 아버지 소순과 아들인 소식, 소철 형제의 문장이 뛰어나서 삼소(三蘇)라고 하였고, 조선의 박정·박상·박우 3형제의 글과 서예가 뛰어나서 삼박(三朴)이라고 하였다.

 박순(朴淳)은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박지흥의 손자이며 아버지 박우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산강변 사암나루에서 학문을 하였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 되어 조식, 이황, 기대승 등과 교우했다. 18세의 나이에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2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31세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이조좌랑, 정5품 홍문관교리 등을 두루 거쳤고 호당(湖堂)에서 학문을 계속했다. 33세에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다시 정4품 홍문관 응교로 승진했다.

당쟁으로 파직되어 광주에 은둔

 박순은 38세에 명종으로부터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어명을 받았다. 임백령은 이조판서에 재직 중에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종1품 우찬성으로 승진하여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사망했다. 박순은 임백령을 ‘소이(昭夷)’로 폄하하는 시호를 올렸다가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광주로 내려갔다.

 종4품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복직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정3품 사간원 대사간으로 승진하여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축출했다. 윤원형은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남동생으로 조카 명종의 배후에서 을사사화를 자행하여 영의정까지 승진한 전형적인 척신(戚臣)이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척신 윤원형과 첩 정난정은 자결했다.

 66세의 퇴계 이황이 종2품 제학으로 재직 중에 44세의 박순이 정2품 대제학으로 제수됐다. 박순이 대제학을 거절하며 나이와 학문을 이유로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요청했다. 결국 대제학 박순은 제학 이황을 깍듯이 모셨다고 전한다. 박순은 정2품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겸임했고 정1품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고 다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정1품 영의정에 임명되어 7년 동안 재직했다.

66세 제학 이황을 스승으로 모셔

 박순은 당쟁에 앞장서서 탄핵 상소를 받은 율곡 이이를 옹호하다가 오히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순은 아들이 없었으나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출가한 한탄강변에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함없다는 뜻으로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집을 짓고 은둔했다. 63세의 나이에 ‘내가 가는구나.’라는 짧은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자 ‘문충’을 시호로 내렸다.

 충과 효를 강조하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라보다 집안이 우선이지만 예(禮)로써 보면 나라가 존귀하고 집안은 낮다고 말했다. 선조는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곧은 절의와 지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찬사했다.

 박순은 15년 동안 정승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됐다. 생존 시에 청백리에 선발된 자를 ‘염근리’라 불렀다가 사후에는 ‘청백리’라 불렀다. 유림들이 경기도 포천의 옥병사원으로 사액 받아 박순의 위패를 모셨다.

 ‘삼십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허물어지고, 마을도 황폐하네 ~ 어릴 적 이름으로 겨우 알아보고 서로 눈물 흘리고 하늘은 바다 같고 달은 벌써 한밤을 흘러가네’라고 읊던 박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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