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승려이며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속명은 장중부이고 무안 삼향에서 출생하여 나주 운흥사에서 민성(敏聖)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남 대흥사에서 민호(玟虎)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화순 쌍봉사에서 토굴을 짓고 참선을 하였다. 다시 해남 대흥사로 돌아와서 연담(蓮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艸衣)’라는 호를 받았다.

 해남 대흥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천년고찰이다. 승병장 서산대사의 의발을 비롯한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연담은 화순 출신으로 대흥사의 12대 대종사(大倧師) 중 한 분이며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전수했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 동안 선과 차에 관한 연구에 정진했다. 승려로서 범패에 능했으며 그림을 잘 그려 대흥사의 대부분의 불화와 탱화를 그렸다. 선을 수행하는 것과 차를 마시는 것을 일치시켜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대흥사 일지암에서 40년 동안 정진

 또한 선(禪)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침체되어 있던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히 차는 물론 원예에도 조예가 깊어 대흥사에 직접 차를 기르며 종자를 개발했다. 명맥만 유지되어 오던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하여 ‘시서화다사절((詩書畵茶四絶)’이라고 불렸다. 또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비롯해 수많은 저술을 통해 다도의 이론을 확립했다.

 초의선사가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다신전’은 ‘조주차(趙州茶)’가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조주차(趙州茶)는 ‘차나 마시고 가라’며 차를 선문답으로 끌어올린 당나라 조주선사로부터 유래됐다. 조주선사는 제자에게 ‘방하착 하지 못하면 착득거 하거라’는 말을 남겼다. 방하착(放下着)은 ‘짐을 내려 놓거라’는 뜻이고 착득거(着得去)는 ‘계속 지고 가거라’는 뜻이다.

 ‘옥화 한 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초의선사는 한 잔의 차의 맛과 멋을 동다송 제16송에 남겼다.

 초의선사는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丁若鏞),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金正喜), 조선 제일의 시인인 신위(申緯), 정약용의 둘째아들인 정학유(丁學游),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洪顯周,) 우의정을 역임한 한계원(韓啓源), 남종화의 대가인 허유(許維) 등과 깊게 교우하며 조선 후기의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산·추사 등과 깊게 교우

 초의선사는 강진으로 유배온 정약용(丁若鏞)을 스승처럼 섬기며 유학과 시문을 배워 실학사상을 계승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다도를 배워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물과 불이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어서’라는 시를 통해 다도와 선(禪)이 하나라는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을 강조했다. 특히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와 교분이 두터워 다섯 차례나 제주까지 방문했다. 추사가 사망하자 과천까지 조문을 다녀와서 일지암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입적했다.

 초의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 생가 터에 생가를 복원하고 추모각과 추모비를 비롯해 유물관, 다도관 등을 마련했다. 인근에는 2001년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무안회산백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청초한 마음’을 뜻하는 백련(白蓮)은 연못에서 자생하는 흰색 꽃이며 7월부터 9월까지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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