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은 왜구를 소탕한 고려의 명장 정지 장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광주향청의 좌수이며 어머니는 노비였다. 향청은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며 좌수는 향청을 책임지는 하급관리이다. 정충신은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 자식을 노비로 삼는 노비종모법에 따라 노비의 신분이 되었다. 정충신의 어머니는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뛰어나와 안겼다는 태몽을 꾸고 정충신을 낳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3품 광주목사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했다. 임시 도절제사로 임명된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전라도 이치전투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격퇴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했다. 권율의 이치전투 승전 소식을 담은 장계를 16세의 정충신이 선조가 임시로 머물고 있던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전달했다.

 정충신은 정2품 병조판서 이항복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익혀 행재소에서 열린 무과시험에 합격했다. 이항복은 충신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선조는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무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정충신인 스승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여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승진

 정충신은 만포첨사와 안주목사로 임명되어 국경을 수비하며 여진족의 침입의 대비책을 주장했다. 절친한 친구인 이괄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였으나 정충신은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정충신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전부대장으로 반군을 물리쳤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정충신은 정3품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종2품 부원수로 임명되어 활약했다. 인조의 후금과의 단교정책을 반대하고 화의를 주장하여 당진으로 유배되어 장연으로 이배됐다. 해배되어 종2품 포도대장과 종2품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됐다. 정충신의 병이 심해지자 인조가 의관을 직접 보내 치료를 하였으나 안타깝게 사망했다. 인조는 정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청나라와 단교하여 병자호란을 자처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일어나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당했다.

장군의 군호에서 ‘금남로’ 명명

 정도천년 전라도(全羅道)는 고려 현종 때 전주와 나주의 첫 자를 따서 명명했다. 고려 현종은 거란족 요나라 성종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전라도 나주까지 피란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전라도는 삼별초 항쟁, 임진왜란 의병,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전쟁,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민중항쟁 등 조국과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개인과 가족을 버리고 언제나 일어선 곳이다.

 광주광역시는 금남공 정충신 장군의 군호를 따서 금남로라고 명명했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장로라고 명명했다. 또한 경열로의 정지 장군, 제봉로의 의병장 고경명, 죽봉로의 의병장 김태원 뿐만 아니라 고봉로의 유학자 기대승, 송강로의 문학가 정철, 사암로의 영의정 박순, 눌재로의 청백리 박상, 의재로의 남농화 허백련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정충신 장군과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곳이며 5·18 영령들의 혼과 넋을 위로하는 곳이자 우리나라 민주화의 성지이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쓰러져간 선조들의 거룩한 피와 땀을 결코 잊지 않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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