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金龍周)는 1905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영일에서 성장한 친일파 기업인이다. 18세에 조선식산은행에 취직하여 영일군 포항읍에 정착했다.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독서회와 노동야학을 조직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3·1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삼일상회(三一商會)를 설립했다.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됐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조직한 조선 최대의 합법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일군 지부 간사로 활동했다. 포항영흥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여 애국운동을 하였다.

김용주, 영흥학교 인수 민족교육 실시

 김용주는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13도 도청의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경상북도 도회 평의원에 당선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용주는 가네다 류슈(金田龍周)로 창씨개명하고 대표적인 조선인 친일단체였던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도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대구국체명징관 건립’에 1천 원을 헌납했고 황국신민화를 위한 ‘대구신사 건립’에 2천 원을 헌납했다. 다시 미국과 영국을 격멸할 군용기 5대를 헌납하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는 내용을 사사히신문(朝日新聞)에 광고를 하였다.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하여 징병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며 친일행적을 하였다.

 김용주는 해방이 되자 적산기업 중 하나인 전남방직을 불하받아 갑부가 되었고 이승만이 집권하자 대한해운공사 초대 사장을, 박정희가 집권하자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김용주의 가족들은 일제 강점기에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됐고 영흥학교를 인수하여 민족교육을 하였으며 단군묘 건립을 주장하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용주는 일제의 강요로 의해 비행기 헌납을 비롯한 징병제를 독려하는 기고와 연설을 하였다고 주장하며 친일행적은 모두 날조된 허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행기 헌납하며 친일행보 걸어

 전남방직(全南紡織)은 1935년 일제가 전라도 광주에 설립한 가네보방적으로 목화에서 면사를 뽑아내는 섬유업체이다. 일제 강점기에 3000여 명의 10대의 조선인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곳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전남방직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미 군정으로부터 김용주, 김형남(숭실대학교 창업자), 이한원(대한제분 창업자) 등에게 공동으로 적산불하되었다. 1954년 전남방직(김용주)에서 일신방직(김형남)이 분리됐고 1970년 전방(全紡)으로 변경했다.

 김용주는 강정순과 사별하고 강신팔과 재혼하여 김문희(용문재단 이사장)와 김창성(전남방직 회장)을 낳았다. 다시 조선일보 방상훈의 고모인 방연숙과 삼혼하여 김무성(전 새누리당 대표)을 낳았다. 김문희와 김창성은 김무성과 이복자매 사이이다. 김용주의 딸 김문희는 현준호의 아들인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과 혼인하여 현정은(현대그룹 회장)을 낳았다. 현준호는 조선총독부 참의를 역임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고 김문희는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정은은 정주영의 아들인 정몽헌(현대그룹 회장)과 혼인했다. 김용주의 아들이자 김무성의 이복형인 김창성 회장은 전방 정문 입구 잔디밭에 친일파 김용주의 대형 전신 동상을 세웠다.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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