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신라와는 선린우호 외교를 하였고 후백제와는 등거리 외교를 하였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자 고려 왕건은 직접 후백제 견훤을 공격했다. 왕건은 대구 공산성에서 견훤에게 오히려 포위를 당했다.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싸우는 사이에 왕건은 군졸의 복장을 하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장수를 비롯한 5,000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궁예 폐위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
왕건은 목이 없는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매장하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신숭겸 묘지는 황금 두상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봉분이 3개인 1기3분(一基三墳)이 조성됐다. 왕건은 대구 공산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신숭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고려 6대 임금 성종이 정1품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태조 묘정에 배향했다. 곡성 덕양사, 대구 표충사, 춘천 포도서원 등에 제향했다.
‘님을 온전히 하시는 마음은 하늘가에 미치시니 / 넋은 가셔도 삼으신 벼슬만큼은 또 하는구나 / 오오 돌아보건대 그때의 두 공신이여 오래되었으나 / 곧은 자취는 나타나는구나’ 고려 18대 임금 예종이 평양의 팔관회에 참관하여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뜰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왕건이 신숭겸과 김락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술을 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기 위해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대구에는 왕건과 신숭겸에 관한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신숭겸, 김락 등 여덟 장수가 순절했다는 ‘팔공산’, 신숭겸과 김락이 전사한 곳이라는 ‘미리사’, 왕건의 군사가 패배한 곳이라는 ‘파군재’, 왕건을 살린 신숭겸의 지혜가 오묘해서 붙여진 ‘지묘동’, 왕건이 도망가다 바위에서 쉬었다는 ‘독좌암’, 왕건이 비로소 안심했다는 ‘안심’, 반달이 떠서 도망가는 길을 비췄다는 ‘반야월’ 등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숭겸, 왕건을 대신해 전사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섬진강가에 신숭겸의 생가인 ‘용산재’가 있다. 용산재에는 신숭겸의 태를 묻은 단소를 비롯해 유허비, 유허단, 유허각, 동상 등이 있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에 선조가 ‘덕양사’를 창건했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자 선조가 중수했다. 숙종이 사액했고 대원군이 철훼하자 복원했다.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왕건이 신숭겸을 추모하기 위해 ‘지묘사’를 창건했다. 고려가 멸망하자 폐사됐고 광해군 때 충렬사로 재건했다 현종 때 표충사로 사액됐고 대원군이 철훼하자 복원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신숭겸의 묘역에는 3개의 봉분과 함께 신도비, 사당, 영정각, 기념관 등이 있다. 조선 최고의 현모양처인 ‘신사임당’,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 구한말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등이 신숭겸의 후손이다.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신숭겸 같은 충신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서일환<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