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서일환 저자가 펴낸 역사야톡6.
서일환 저자가 펴낸 역사야톡6.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새 /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김영랑 시인이 1935년 ‘영랑시집’에 발표한 ‘두견(杜鵑)’의 첫 구절이다. 두견은 뻐꾸기과에 속하는 새로 봄부터 여름까지 밤낮으로 슬피 울며 휘파람새의 둥지에 탁란을 한다. 두견은 자규, 두견이, 접동새라고 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조년은 ‘일지춘심을 자규야 아랴마는’이라고 읊었고, 단종은 ‘가슴에 타는 심정 두견이 아랴마는’이라고 읊었다. 김소월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했다.

김영랑은 1903년 전남 강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민족시인으로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에 결혼하여 1년 반 만에 사별했다.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과 교류하며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하여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석방이 되자 일본 도쿄로 유학 가서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영문학과에 재학 중에 간토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거부

김영랑은 일본에서 돌아와서 조선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와 사랑에 빠졌으나 양가의 반대로 사랑에 실패했다. 1925년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하고 원산 루씨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김귀련과 재혼하고 고향 강진에 머물렀다.

김영랑은 1931년 ‘향수’와 ‘고향’의 작가 정지용, ‘떠나가는 배’를 남긴 박용철과 ‘시문학(詩文學)’을 창간하여 창간호에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과 ‘언덕에 바로 누워’를 발표했고 2호에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를 발표했다. 시문학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이념보다 순수문학을 추구한 단체이다.

김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1934년 4월 ‘문학(文學)’ 3호에 발표됐고 1935년 11월 ‘영랑시집’에 재수록되었다. ‘영랑시집’은 박용철 시인이 김영랑의 시 53편을 모아 ‘뉘 눈길에 쏘이엿소’, ‘바람이 부는 대로’, ‘눈물에 실려 가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두견(杜鵑)’ 등을 제목을 빼고 모두 일련번호만 붙여 발행했다.

김영랑은 1949년 자선집 ‘영랑시선(永郞詩選)’을 발행했다. ‘영랑시선’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바다로 가자’, ‘두견(杜鵑)’ 등의 60여 편의 시가 포함됐다. 북도의 김소월과 더불어 남도의 김영랑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힌다.

북도의 김소월과 남도의 김영랑

김영랑은 초기에는 식민지 백성의 슬픔과 눈물을 표현했고, 후기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를 표현했다.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김영랑은 해방이 되자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1950년 9월 유탄에 맞아 4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유해는 남산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54년 11월 서울 망우리에 공동묘지로 이장했다. 광주 광주공원에 시비가 세워졌고 강진에 생가가 남아 있다.

강진 영랑생가는 김영랑이 태어난 곳으로 본채, 사랑채, 문간채, 장독대,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위쪽은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앞쪽 돌담은 담쟁이넝쿨이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는 은행나무, 동백나무, 꽝꽝나무와 함께 모란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와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세워졌고,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영랑을 비롯해 막내딸 김애란과 손녀 김혜경이 건국포장을 받았다.

 

서일환<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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