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결 같은 영산강을 지나 나주를 가다

▲ 영모정.
 목포에서 어느 서울 손님을 만났다. 용산을 출발한 KTX의 최종 목적지는 목포인데 익산 어느메쯤 지나니 나주의 곰탕 냄새가 솔솔 풍겨서 참지 못하겠더란다. 해서 급작스럽게 나주역에 정차해서 택시를 타고 나주 읍성의 식당을 다녀왔다고 한다. 9천원의 곰탕 보다 시간과 부대비용이 더 많았을 터 이지만 만족도가 최상이었다고. 한 지역을 상징하는 음식의 힘은 이렇듯 대단하다.

 제주를 가면 나는 늘 어기지 않고 고등어 회로 시작해서 고등어회로 종료한다. 전주를 가면 콩나물국밥을 빠뜨리지 않는다. 본디는 전주비빔밥이었지만 근동의 식당들이 한꺼번에 가격을 인상하고 일괄적으로 받으면서 비빔밥 정신이 훼손되었다 여기고 출입을 금해 버렸다. 맛의 기원은 지역의 풍토와 기후와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전주가 그렇게 콩나물로 유명하게 된 이유에 대해 민속학을 하는 친구가 전주천의 물에서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어 소리친 적이 있다. 철분이 많은 물을 마시는 전주사람들의 몸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콩나물이라는 것이었다.

 전국의 장터를 배경으로 해서 국밥이나 국수가 발전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터이다. 국밥 종류는 근동에 가축시장이 있어서 값싼 원재료 구매가 손쉬운 탓이고 국수는 한국식 페스트 푸드라 할 만큼 금방 공급되는 음식이기 때문 아닌가. 나주의 곰탕에는 평야를 기반으로 한 곡창으로서 나주의 위상을 이해하는 코드이기도 하다. 인력과 축력에 의존했던 논농사는 이런 드넓은 뜨락에서 더욱 소의 힘이 필요했을 터이다.

 

 나주·영산포 어팔진미·소팔진미

 

 인간과 더불어 사는 소는 손택수 시인의 시를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살아서도 매를 맞고 죽어서도 북이 되어 매를 맞는 운명. 그 소가 어느 한곳 버릴 것 없는 고기가 되어 인간의 수저 위에 또 보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곰탕의 발원이다. 언젠가 아랍어를 가르치는 한 선생님이 사우디와 요르단으로 노동인력들이 파견되던 한 식당의 일화를 말씀 하셨다. 소의 도축이 제한적인 나라에서 현장의 필요에 의해 합의되고 소고기가 공급되었는데 주방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살코기만 공급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 연유를 물어보니 고기 외에는 다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버리는 것들, 이를테면 다리나 뼈나 꼬리, 머리 등을 우리에게 버려 달라고 요구하니 영문을 모르는 그들은 죄다 갖다 주었다고 한다. 매주 몇 마리의 소를 공급하던 업자는 한동안 주문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우리 국민들은 죄다 알 터이다. 거기 버리는 것에서 국물을 고아 먹고, 탕을 해 먹고 갖은 음식을 다 해먹었으니 소고기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아랍의 업자들은 그제야 버려야 할 것들에게도 돈을 메기기 시작했다는 에피소드다.

 이렇게 환경의 요인과 사회적 금기 사이에 간극도 커진다. 오늘 날 곰탕으로 대별되는 나주와 홍어로 대표되는 영산포 그 안에는 잊혀진 것들이 존재한다. 어팔진미와 소팔진미가 그것이다. 생소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전주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전주에서는 사또에 앞에서는 아전이 최고, 아전 앞에서는 기생이 최고, 기생에게는 음악과 춤이 최고이고, 음악과 춤 앞에서는 음식이 최고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감영을 둔 오래된 도시이니 그 격이 남달랐을 터이다. 단순한 지방 수령이 아니라 최고 수령이 집무하고 사는 곳이니 그 위상에 걸맞는 음식이 공급되었음을 이 말이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이다. 나주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나주 아전의 위세와 역할은 결국 전라도의 중심을 광주로 옮기게 된 또 하나의 이유라고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어팔진미를 찾아보자. 나주 역사이야기라는 블로그를 보니 예부터 맛은 나주, 모양은 전주라고 했다고 전한다. 나주는 이를 증명하듯 영산강 주변의 지방수령과 방백들이 임금께 물산을 바치는 물목이 많았는데 그중 나주는 영산강에서 나는 물고기 종류로 조금물 또랑 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 황룡강 자라, 복바위 복어를 지칭했다고 한다. 8가지의 물고기가 유명했다는 것이니 화순 동복이 생각난다. 동복을 삼복의 고장이라 했는데 삼복은 복천어와 복청과 복삼을 의미했다. 섬진강 자락의 동복에서 잡은 물고기가 왕에게 진상되었던 것이다. 그럼 소팔진미는 나주에서 나는 채소류였다. 동문안의 미나리, 산월의 마늘, 홍룡동 두부, 사매기 녹두묵, 전황면 생강, 솔개 참기름, 보광골 열무, 보리마당 겨우살이가 있었다. 이 모두가 생경한 풍경이 되었다. 이제는 접하기 힘든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전술했듯이 곰탕과 홍어 그리고 구진포의 장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길이 막히고 타오르는 강자락은 평지로 흡수 되었다. 지형과 지물이 변색을 했고 즐겨 찾던 음식의 취향도 달라졌으니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쉽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에 나주의 존재감은 음식의 으뜸이었는데, 그 자리마저 이제 밀쳐지고 만 것이다. 영산포의 홍어집에서 홍어가 들어간 모든 식재료를 다 먹어본다. 단연코 으뜸은 홍어애다. 그 싱싱한 간이 전하는 물컹하면서도 아삭함 그 사이에 담백한 식감은 2년 만에 최고의 음식을 대한 듯 상쾌했다.

 

 황포돛배를 타다

 

 홍어로 배를 채우고 돛배를 타러 영산포를 빠져나온다. 저기 흑산도 아랫녘 영산도 사람들이 공도정책을 피해 자리 잡은 것에 유래되었다는 영산포라는 이름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영산포는 홍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신안의 섬 아래 제국 일본은 수탈의 첨단기지로 목포항을 개항하고 영산포까지 세력을 뻗쳤다. 하니 영산포에는 내륙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강등대가 서 있다. 운행을 멈춘 강등대는 전봇대처럼 남아있지만 사람들은 희소한 가치에 눈길을 던져준다. 등대 아래에 내륙의 선창이 있다. 무대화된 고유성이라고 할까 이제는 사람의 교류가 아닌 관광객의 눈요기를 위해 운행하는 황포돛배가 나주 천연염색문화관까지 운항한다.

 바람의 힘이 아닌 위장된 돛대 밑에 동력장치가 물살을 가른다. 강에서 배를 타본지 오래라서 이마저도 시원하다. 아랑의 애틋한 전설이 깃든 바위를 지나고 백호 임제의 시비가 있는 영모정을 스치운다. “사해의 오랑캐가 황제라 칭하고 중원을 다스리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들을 섬기기에만 열중하는 나라에 내 태어났으니 서럽다. 나 죽더라도 곡을 하지 말라”고 했던 물곡의 시비가 있는 곳. 깊이 눈길을 보낸다.

 사드가 들어선다고 죽자 사자 반대하던 분들이 정작 사드를 데려온 집단에게 표를 주는 아이러니는 또 무엇인지 싶어지기도 하고, 수많은 배신과 반역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거쳐 간다. 그리고 내 삶에도 고광헌 시인의 마흔 이란 시가 스친다. “섣부르게 이기려고 흉내 내면서 이만큼 올라왔다. 발아래 자욱한 눈물천지 빈가지 눈 맞고 선 나무들 지면서 살아간다” 지면서 살아가노라고 맹세하면서도 내 자신을 배반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돛배는 미끄러지듯이 헤쳐 나간다.

 이윽고 우리가 당도한 곳은 나주천연염색문화관이다. 영산강의 범람이 만들어낸 비옥한 토지위에서 쪽을 키워낸 사람들과 나주의 샛골나이로 대별되는 포목의 역사는 나주를 색깔 있는 도시로 만들어 냈다. 샛골나이의 늙으신 장인이 베를 짜고 있다. 목화를 이용해 잣고 있는 포목에서 문익점의 노고가 다시 떠오른다. 우리의 역사는 배신과 분노 사이에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이 얼마나 견고하게 지렛대를 받쳐 주었는지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염색 체험에 들어간다. 모든 것이 완비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한 시간 반 정도를 주물럭거리면서 양파색을 들인 스카프를 만들었다. 홍어 맛과 천연염색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나주를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우리는 더 깊은 역사 안으로 끌려갔다. 바로 나주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고분군 박물관에 이른 것이다. 20여 년 전 대학 강의를 다닐 때 찾았던 복암리 고분군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그 인접한 곳에서 일괄 출토된 유물이 더 빛을 발했다. 해서 박물관이 세워진 것이다. 무덤 아래 무덤, 그 아래 또 무덤이 둘러선 무덤의 아파트군 같은 복암리 고분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얘기는 다음호에 더 깊게 전해 드리기로 하자.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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