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술, 예술

▲ 지역문화네트워크 모임, 대전에서 모이다.

 대전에서 모이자는 전갈이 왔다. 매해 두서너 번은 만나는 느슨한 모임 지역문화네트워크 포럼이 이번 행사의 개최지를 대전으로 정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 인천에서 이뤄진 지역문화인들의 교류를 시발로, 이렇게 헤어지면 안 되고 뭐라도 연결 고리를 두자고 해서 만들었던 조직 아닌 조직이었다. 그리고선 이곳저곳 대도시와 소도읍을 오가며 적어도 한 해 한 번 이상은 끊임없이 만나길 15년째다.

 사람이 모이자면 돈이 필요한데 다행히 그 종자돈은 부산MBC의 부설 문화도시네트워크에서 지원해 주었다. 광주가 문화수도가 되겠다고 나서면서 몇 차례의 전국 단위 문화 활동가의 모임을 갖긴 했지만 연속성을 가져가진 못했고, 부산은 방송사의 부설 단체를 통해 전국단위 활동가의 모임을 지원한 것이다. 한류의 도시라고 하는 전주도 매해 전국의 문화이론가와 활동가를 초대하여 포럼을 지속한지 10여년 차에 이른 것에 견주면 광주는 무얼 하고 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하여튼 이번 대전 포럼의 이슈는 바뀐 정부의 문화정책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관건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정책은 창조라는 말속에 일종의 산업화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문화 활동은 블랙리스트란 암흑 속에 갇혀 지냈다. 암암리에 알면서도 방조하거나 기피하였던 것이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는 데에는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이 된 도종환 의원의 역할이 컸다. 이른바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는 세상을 요동치게 하면서 사상 초유의 탄핵이 이뤄지고 급기야 정권이 교체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이미 전전 정권 때 나는 문화부의 산하기관으로부터 이제 얼굴을 보기 힘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저층의 기반부로부터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기별이 오는 것은 더 열심히 현장에 충실하라는 전갈로 들려왔다. 하여튼 새 정부의 문화정책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문화를 이야기하는 화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이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고, 생활문화전반을 진흥하겠다는 것, 지역의 문화재단의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것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정작으로 문화전반의 생태계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현 정부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심 공동화 구도심서 만난 예술이들

 문화예술교육이 전면 시행되면서 미래의 예술가들은 예술의 창조적 생산 활동 보다는 생계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활문화진흥법이 등장하면서 더 강조된 생활문화는 장르예술의 퇴보 혹은 무관심을 가져오게 되는 주 요인이라는 것을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장르예술 분야의 고령화는 심화되었고, 그나마 지원정책의 주를 이뤘던 공연예술은 활황을 이루었다. 한류의 영향도 있었고, 무엇보다 계량적 수치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이유였다. 즉, 1회 공연당 찾아오는 관객들이 많아서 문화향유의 척도 계산에서 늘 눈에 띄게 효과가 크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이를 수행하는 한국문예예술회관 연합회는 덩치가 커졌다.

 예술인 복지와 관련해서도 재단이 생겨났지만 현장 예술인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채기를 내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내오고 있다. 편중된 지원, 기초예술에 대한 편 가르기 지원, 현장 예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절정은 ‘E-나라 도움 시스템’이라는 정산 방식에서 접점을 찍었다. 정부는 이 시스템을 통해 투명한 예산 집행과 중복 예산 집행의 방지, 일사불란한 국가 회계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국가 지원 예산을 사용하는 이들은 예비 범죄자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해서 이 따위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는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생겨났음에도 새로 들어선 정부는 묵묵부답의 상황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포럼에 뒤늦게 도착한 나는 도심 공동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전의 구도심에서 전국의 활동가 선배들과 합류했다.

 원도심이라고도 하는 곳에서는 우리는 저녁을 먹고 추억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카우보이라는 카페에 들렸다. 사랑과 평화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불렀던 유지연이란 분도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고 하니 믿음이 갔다. 무대가 비어있는 것을 본 마임이스트 조성진 선생이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 즉석 공연을 한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라는 노래가 열창된다. 노래를 듣던 이들 모두 지난 시절의 아픔을 잊은 채 합창을 한다.

 

 지역화폐 두루 사용 원도심레츠

 그렇게 대전의 밤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대전 원도심 투어에 나선다. 지역 화폐 ‘두루’를 사용하는 원도심레츠에 들렸다. 도심형 품앗이를 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레츠의 아침 식사와 그들이 살려내고자 하는 마을 공동살이의 이념은 아름다웠다. 육아의 공동체로부터 시작하여 공간, 재능 등을 나누는 삶이 공동화폐인 ‘두루’를 통해 두루 두루 비워진 곳을 채워가고 있었다.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1966년 미국남장로교회가 설립했던 교회로 갔다. 대전에서 산호여인숙을 운영했던 부부가 젠트리피케이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2차의 접점을 찾아낸 것이 바로 이 교회였다. “구석으로부터”라는 간판을 걸었다. 교회에서 점차 창고로 사용하는 공간은 미군들이 공수해낸 목재를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오크목의 짙은 색감이 공간을 경건하게 꾸미고 있었다. 가만히 년도를 생각해 보니 그 비슷한 시기에 미군이 공수해서 만든 건물이 전라도에도 있다. 바로 지리산 왕시루봉의 선교사 별장이 그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 또한 남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하면서 풍토병을 이겨내기 위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 공간을 눈 밝게 찾아낸 부부는 이곳을 변방 예술인의 플랫폼으로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전한다.

 대저 지난번 목포에서 일제의 적산가옥을 바꿔 만든 문화예술협동조합 나무숲을 보며 부러워했고, 몇 해 전부터 대구 남구의 근대골목 삼덕상회의 새로운 탄생을 부러워했는데 우리 광주는 어디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겨우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 창작스튜디오’와 ‘게스트 하우스’가 떠오른다. 오래된 것, 낡은 것의 새로운 탄생은 이렇게 눈 밝고 부지런하고 정 많은 사라들의 손길에서 시작되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의자 몇 개를 가져와 앉으니 주인장이 아코디언을 가져와 연주를 한다. 서울청년허브의 차재근 센터장도 오래된 노래로 우리를 기쁘게 한다.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은 앞으로 무한한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 우리는 두 부부의 새로운 출발이 큰 결실을 이뤄낼 것이라 기대하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다음 코스를 향해 떠났다.

 

 ‘시울’따라 골목골목 정겨운 풍경

 이번에는 철도노동자들의 사옥이 있는 곳으로 갔다. 대전, 이 나라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이지만 KTX의 등장은 대전의 지형을 하루아침에 텅 빈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은 사람이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발전한다는 이치를 대전문화재단의 이춘아 대표가 말씀하신다. 노동자들이 떠난 텅 빈 집에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소제창작예술촌이 그것이었다. 몇 채의 집에 시 쓰는 분, 그림 그리는 분, 설치미술을 하시는 분들이 깃들엇다. 그들의 재능과 공헌이 그나마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의 공허함을 달래주는 듯 했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누군가 꿈을 키웠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자리에서 예술가들은 또 자신의 꿈을 키우고 사회적 발언을 해온다. 그들의 지필묵을 본 대전문화재단의 임창웅 팀장이 붓을 든다. ‘지역문화입국’ 그렇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일필휘지로 지역문화의 강성함을 기원하는 열정에 모두들 박수를 보낸다. 예술촌이 들어선 마을의 이름이 시울이라고 했다. 시울은 눈시울 즉, 눈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옛적에 여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하니 예술촌 이름에 堤(둑제)가 들어간 것이다. 지명에는 그곳의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사람과 흙과 물방울의 흔적이 남아 있음이 또 여실히 증명된다.

 시울을 따라 가니 골목골목 정겨운 풍경이 들어온다. 저 좁은 골목을 때론 넓히고 좁히고 키우고 늘려가면서 살아왔던 삶은 이제 어디론가 떠나가고 수직의 골목 엘리베이터가 들어온다. 재개발로 우리는 골목을 잃고 사람살이의 정겨움도 잊고, 관계도 잊고, 쓸쓸하게 고독하게 자기 땅에서 유폐를 자청하고 있다. 그리고 비워진 곳에 마치 예술가가 동원되듯이 들어온다. 낡은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신기한 마술사는 그 안에서 꿈틀대며 다시 온기를 찾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살겠다 싶으면 포클레인이 그 공간을 허물고 꿈도 허물고 악다구니를 치며 달려온다. 이런 반복된 생활이 제발 그만 되고, 예술가들이 편안하게 창작할 수 있는 정주 공간, 창작 공간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선배들은 골목안 슈퍼를 찾아냈다. 청양수퍼에서 캔 맥주 몇 병을 사오고, 우리는 조그만 방에서 슈퍼의 주인장이 들려주는 기타의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저 좁은 골목은 그럼에도 저런 위대한 기타리스트를 키워낸 정기를 지녔다는 것을 시울마을에서 다시 한 번 느끼며 사는 사람과 살아왔던 사람과 살아갈 사람 사이의 간극이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해 보며 대전에서의 이틀을 마감 지었다.

글·사진=전고필<대인예술시장 감독,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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