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가·빌궁·바람·하늘·초원·별…
이제 우리는 나츠가 씨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채소를 싫어하고 과자와 고기를 사랑하는 ‘초딩’ 입맛을 가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가 호랑이 띠이고 호랑이 띠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틈만 나면 자신의 델리카 차량을 광나게 닦고 정비하는 그를 보면서 프로의식과 부지런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도 우리 일행에 대해 다소 알게 됐다.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우리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는지 알게 됐고, ‘띠’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당구를 가르쳐줬고, 어느 게르 캠프에 마련된 당구장에서 말도 안 통하는 몽골 여행객들과 당구 내기를 하며 ‘웃음’을 섞었다.
▶운전사 나츠가의 손때묻은 다이어리
여행 마지막 전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보드카를 나눠마시던 중, 나츠가 씨가 우리에게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삼성 로고가 박힌 2010년 손때 묻은 낡은 다이어리였던가. 빌궁이 “아저씨가 오늘 저녁 숙소에 가서 자기 전에 이 노트에 자기가 부족했던 것이나 바라는 점 같은 것들을 써달라고 하시네요”라고 전해줬다. 다음 여행객들을 안내할 때 참고하겠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는 성실했다. 그도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트를 받아들었다. 숙소에 가서 노트를 폈다. 글씨 크기도 글씨체도 제각각인 글들이 빼곡했다. 이전 한국 여행객들이 적은 글들이었다. 나츠가 씨는 ‘평가’를 주문했지만, 이전 여행객들은 애정어린 ‘편지’들을 적어 놓았다. “아저씨, 고기도 좋지만 몸 생각해서 채소도 좀 드세요.”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글들엔 ‘애정’이 듬뿍했다. 노트를 읽으며 생면부지의 앞선 여행자들과 ‘연결’됐다. 우리 일행도 나츠가 씨에게 장문의 글을 남겼다. 우리가 몽골을 떠나더라도 나츠가 씨는 가끔 노트를 들쳐보며 ‘우리’를 생각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여행 내내 즐거웠고 알게 돼서 영광이었다”고. “여동생들 생각이 났다”고. “내년에 몽골에 다시 여행을 오면 자기가 직접 우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내년에 올 땐 고비 사막에 꼭 가보라”고. 아니 “같이 가자”고.
그리고 빌궁. 이제 우리는 그가 그의 주장과는 달리 당구를 그닥 잘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잠이 무지 많은 것도 알게 됐다. 그가 말을 제법 잘 타는 것은 5살 때부터 말타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됐다. 그의 꿈은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무사히 졸업하고 한국에서 배우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됐다. 부모로부터 학비와 용돈을 받는 걸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방학 때마다 몽골로 돌아가 가이드 알바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외국인들이 모여 다양한 썰을 풀어내는 한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게 됐다.
▶송아지 유리·고비사막을 기약하며
그리고 한국에선 이만수로 불렸던 바타 씨. 2003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3년 동안 이주노동자로 일했던 바타. 그리고 몽골로 돌아와 소와 양을 키우며 유목 생활을 하는 바타. 그와 함께 했던 1박2일 동안 정이 들어버린 만수아저씨 바타. 한국서 자신을 고용했던 ‘사장님’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한국에 돌아가면 “만수는 잘 살고 있다”고 꼭 전해달라던 그. “삼겹살엔 쏘주지”를 연발하며 별이 쏟아지던 초원에 돋자리를 깔고 함께 술을 마시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그. 우리가 바타 씨와 작별하고 며칠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일행이 떠나고 바로 자신이 키우던 소가 하얀 색 송아지를 낳았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몽골에서 하얀 색은 길한 색이라고. 하얀 송아지가 태어난 걸 “우리 덕”이라며 기뻐했다고. 그리고 바타 씨는 그 하얀 색 송아지에게 ‘유리’(우리 일행 중 바타 씨를 따라 ‘군계일학’의 소몰기 스킬을 뽐낸 이의 이름이 유리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나츠가와 빌궁은 유리에게 동명이‘소’가 생긴 걸 축하했다.
그리고 8박9일의 여정 동안 만났던 모든 인연들. 게르 캠프에서 늘 우리 게르에 따뜻하게 불을 피워주던 차탕족 아가씨 ‘오카’. 게르 캠프 안 스텝들이 돌아가며 돌보는 통에 끝내 진짜 엄마가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귀여운 꼬맹이 ‘너밍’. 20키로에 육박하는 캐리어 서너 개를 거뜬히 들어 주던 몽골 청년. 낙타를 태워주며 낙타를 위해 나즈막히 노래를 불러주던 누군가…. 그렇게 우리 일행의 시간을 완성해 주던 이들.
결국 이별의 순간이 왔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함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해질 무렵 칭기스칸 국제공항에 섰다. 하필 해질 무렵이었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몽골을 넘겨줘야 했다. 우리 일행 네명은 나츠가와 빌궁과 차례로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말했다. 송아지 ‘유리’를 보러, 고비사막을 보러 꼭 다시 오겠다고.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