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스캐년.
 정확히 8시간 여정으로 가까스로 해가 지기 전에 꿈에 그리던 브라이스캐년 앞마당인 루비스 인(inn)에 도착해서 호텔 같은 여관에 여장을 풀고 바로 선셋(일몰)이 아름다운 선셋 포인트로 잽싸게 달려갔다.

해가 지는 곳에 빨갛게 달아오른 캐넌은 우릴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다. 어두워지고 추위가 닥쳐와서 바로 숙소로 내려와서 저녁을 먹으러 여관 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 지역은 주로 이 유서 깊은 여관에서 전체 마을을 모두 개발한 것 같았다. 레스토랑, 기념품점, 말이나 기차 타는 곳 등등 모두 역사가 100년 넘은 이 ‘루비인’의 이름이 앞에 붙어있었다.

레스토랑도 깔끔하고 북유럽풍 미남들이 서빙하는 분위기도 매우 고급스러웠다. 다만 여행 내내 음식만 꾸역꾸역 들어가고 뒤가 개운치 않은 속이 영 불편했다. 아들 녀석이 받아준 뜨거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일은 누구나 한번 쯤 인생 버킷리스트에 올린다는 그 캐년을 본다는 설렘도 잠시 오랜만에 서부영화를 감상하다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아! 존웨인 같은 카우보이들이 설치던 진짜 서부에 왔구나!’
 
▲해가 지르고 빨갛게 달아오르니 ‘침묵’
 
 다음날 부지런한 영훈이 새벽부터 우릴 깨웠다. 나이도 있으신데 두 분도 매우 피곤하실 텐데 마치 우리를 위해서 이 열흘 동안 모든 걸 내려놓으신 것 같았다. 더욱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행히 평소 집안에선 골골대던 광훈이가 튼튼하게 따라와 주고 그 분들에게 리액션도 뛰어나서 여행 내내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녀석 이제 어디 내어놓아도 잘 살 놈이네!’ 세 번째 재발견이었다. 브라이스 캐년에는 뷰포인트가 5개 정도 되는데 어디나 환상적이었다.

맨 끝 레인보우 포인트까지 차로 가서 거기서부터 차례로 내려오면서 포인트마다 멈춰 서서 둘러보았다. 뷰포인트 아래에는 트레일 코스가 있었다.

트레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산책을 하는 곳이었는데 너무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아 오늘은 아주 중요한 트레일만 골라 한두 개 정도 돌기로 했다. 그 날은 날이 좀 쌀쌀했다. 눈도 많이 쌓여있어 눈과 주홍빛 캐넌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첫 포인트는 누가 일부러 나무에 불을 붙였는지 연기가 자욱해서 마치 안개 낀 전쟁터 같았다. 일부러 태워서 간벌을 한다고 한다. 어느 포인트에는 자연이 만든 거대한 아치 다리가 보이고 그리스식 신전 같은 곳도 있었다.

엄마가 아기를 꼭 안고 있는 형상도 보였고, 못난이 인형 셋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 같은 거대한 바위도 보였다. 마지막 일출 포인트에서 우린 아래 트레일 길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또 내려가는 걸로 봐서 그 곳이 가장 인기 있는 트레일 길임이 틀림없었다. 주위에 온통 황토 빛 벽에 토루의 망치도 보이고 무지개 무늬 같은 형형색색의 바위들도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니 위에서 볼 때보다 운치와 색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엔 미끄러웠지만 처음 몇 발자국을 잘 디디니 문제없이 쭉 내려갈 수 있었다. 거기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감상도 많이 했다.

마치 이국적인 행성에 불시착하여 둘러보는 기분이었고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언어들이 뒤섞여진 자연이 만든 바벨탑에 온 것도 같았다.


 다리도 아팠지만 경치에 취해서 사실 아픈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난 원래 보병출신이라 잘 걸어서 괜찮은데 아들이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제법 의젓하게 잘 따라주어 정말 신께 고마울 따름이었다.

영훈이는 혼자서 뷰포인트 위에 남더니 고맙게도 이런 상황들을 한국에 남은 아내에게 일일이 핸드폰으로 전송해주었다. 명녀는 중간까지 우리를 따라와 좋은 카메라로 멋진 사진을 남겨 주었다.

이제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워도 될 만큼 너무나 환상적이고 멋진, 마치 신들이 내려와 흙장난하고 노니는 곳 같은 ‘신의 놀이터’를 살짝 구경하고 나왔다.
 
▲서부시대 갱스터 복장으로 기념촬영
 
 그 날 저녁을 함께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별빛이 빛나는 오솔길을 광훈이와 둘이서 산책했다.

그런데 어느새 영훈이가 멀리서 뛰어왔다. 미안했다. 너무 영훈과 명녀를 배려한 나머지 우리도 모르게 우리와 분리시키고 있었다.

영훈이의 계획 중 하나는 이곳 여관에서 운영하고 사진관에서 서부식 복장을 입고 단체 사진을 찍는 거였다. 우린 이미 짧은 여행 동안 서부에 물들어 있었다.

비수기라 사진관이 문을 닫고 있었는데 간절한 구애 끝에 아침에 겨우 약속을 잡았다. 그 약속을 성사시켜 주기위해 노력해주신 여관의 카우보이 분을 광훈이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광훈이를 위해 그분과 사진을 하나 남겨주었다.

늘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게 소원이었던 광훈이에게 혼자서 수영할 기회를 주었다. 나 역시 뉴질랜드 온천에서 새벽에 혼자 수영한 멋진 기억이 남아있다.

그런데 그렇게 요란을 떨며 들어가더니 얼마 못가서 나와 버렸다. 누가 자기한테 인종 차별하는 발언을 했다나 뭐라나 하면서…. “야! 네가 신기해서 그러지. 그러고 그런 것 너무 신경 쓰지 마. 나쁘게도 보지 말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너무 외모나 남의 말에 집착하는 성격은 좀 고쳤으면 했다.

서부식 복장을 입은 광훈(왼쪽)이와 영훈.

 다음날 아침 우리는 드디어 영훈이가 그토록 소망했던 서부식 사진 찍기에 돌입했다. 사진관에 있는 때 묻은 서부시대 복장을 하고 은행털이 일가족이 되어 최대한 시대극처럼 연출했다.

하지만 역시 서부식 복장은 서양인들에 더 잘 어울렸다. 광훈이와 나는 마치 딴 시대 사람들 같이 어색했다. 하지만 그때도 서부에 중국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다지 않은가.

최대한 범죄자답게 인상 쓰며 한 컷, 활짝 웃으며 한 컷, 뚱뚱보 사진사가 찍어주는 서부식 사진 촬영은 그 과정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광훈이는 이외로 모델 포즈를 잘 취했다. 난 늘 나를 죽이고 숨기고 살았는데 광훈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많이 하는 편이었다.

가끔은 ‘오버한다’고 걱정은 되면서도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난 수줍게 살아서 연애도 취미도 적극적이지 못했기에 그런 점들이 큰 이점으로 보였다.

서부가 점점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젠 마치 나도 서부의 카우보이가 된 듯했다.
최종욱<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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