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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그 붉은 배롱나무의 뒤안
남도의 충절 기림인가, 이 여름 가장 붉다
전고필
기사 게재일 : 2018-08-24 06:05:02
 7월말이면 나는 설레임을 느낀다. 내 고향을 뒤 덮는 배롱나무의 꽃잔치가 천지를 다 장식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뜨거움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그 자신까지도 붉어지는 꽃 배롱. 백일홍, 자미, 쌀밥나무. 이 꽃이 세 번 피고 수그러들면서 남도의 들판도 황금빛으로 여물어간다. 드디어 가을 추수에 몰입할 수 있다.

 ‘호남이 흉년이면 팔도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호남의 들녘은 팔도를 먹여 살리고 의병들의 군량을 조달하느라 분주했다.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호남의 백성들은 쇠스랑과 죽창을 들고 자원해서 입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철옹성 같이 호남을 방어하기 위해 이들은 호남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차단하고 왕을 구하고, 더 확장된 영역을 확보하고자 금산과 진주 등으로 향했었다.

 죽어야만 의병이었던 호남이었다. 어디 다치고 상해보았자 수없이 죽어간 옆집의 아무개가 있는데 살아온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라 여겼고, 그리하여 호남의 절의인물은 죽지 않으면 기록하는데 주저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로운 기상에도 불구하고 임란이 있기 전 호남에는 처참한 피의 숙청이 휩쓸고 갔다. 이른바 기축년에 이뤄진 기축옥사였다. 정여립을 중심으로 하여 모반을 획책한다는 밀고는 진안과 전주와 나주를 위시로 해서 팔도를 뒤숭숭하게 하고 마치 호남의 선비를 다 쓸어버릴 기세로 진행되었다. 나주의 곤재 정개청과 그 후학들에게 이 사건은 씻을 수 없는 아품을 주었다. 이 아픔의 중심에는 성산가단의 주객과 같은 송강 정철도 취조와 사법처리를 맡은 위관으로 끼여 있었다.
 
▲‘호남이 흉년이면 팔도가 굶어 죽는다’
 
 1589년의 호남은 피바다였다. 그리고 불과 3년 후 왜적들의 침입이 이뤄졌다. 파죽지세의 공략에 경상도를 지역에서부터 군영과 성곽은 무너지고 짓밟혔다. 위정자들은 제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했고, 국왕 선조가 죽음으로서 도성을 지킨다고 말하고 뒷문으로 도망쳤듯이 위정자들 또한 그러했다. 오늘날 촛불이 그러했듯 무너진 국가는 백성이 지켜냈다.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관군을 수습하고 영이 서지 않은 곳에 영을 서게 만들었고, 병사가 부족한 곳에 민이 병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조선은 살아났다.

 8월이면 붉은 배롱이 지천을 이루는 무등산 아래 담양에서도 그러했다. 60평생을 붓만 잡던 제봉 고경명이 의병장이 되었고, 혈기와 지혜를 갖춘 26살의 김덕령이 의병장이 되었다. 근동의 읍민이 이들의 병사가 되고 군자금을 조달하고 병장기를 만들고 군량미를 공급하는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1589년 선조는 이 일대를 배반의 땅이라고 칼을 꽂았지만 이 사람들은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조선의 백성이었다. 해서 저 비겁한 왕보다 그들 자신의 국가를 지키는데 신명을 다했다.

 하지만 또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조선 의병의 총수였던 김덕령을 이몽학과 모반을 획책했다하여 압송을 한 것이다. 그리고 모진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한다. 하지만 내통할리 없었던 김덕령은 묵묵히 형벌을 감내하고 마침내 매를 맞아 죽게 된다.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해낸 의병들의 구심 김덕령은 그렇게 역적이 되었다. 그가 남겼던 시가 춘산곡이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왜적의 핍박하에 놓인 국가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칼을 잡았던 장군의 기개였는데 이렇게 안타깝게 스러지는 것을 꽃과 불로 이야기 한 것이다.
 
▲자미탄, 꽃이 붉고 맑은 물이 투영하고…
 
 그가 성장했던 충효동 마을 앞 창계천에는 십리에 걸쳐 백일홍 꽃이 피어 있어 이를 두고 자미탄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한 여름을 붉게 피워 하늘거리고 물위에 그 꽃술이 떨어져 물결에 비틀거리고 다시 물 속에 꽃들의 반영이 투영되는 자미탄은 어쩌면 조국을 위한 민중들의 애끓는 심정을 닮은 꽃 아닌가 싶어진다.

 이런 충효마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명곡 오희도가 살았다. 김덕령이 선조때의 사람이라면 오희도는 오래 산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였다. 늘상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글 공부에 몰두하고 노모를 공양하는데 한결 같았던 그에게 광해군을 폐하고 왕이 되길 원하는 능양군이 찾아왔다. 오희도가 망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그곳 은행나무에 말을 걸어 두고 오동나무 아래에서 천하를 도모할 인재를 찾는 능양군과의 은밀한 이야기가 진행된 것이다. 능양군은 창평의 월봉 고부천으로부터 그의 인품과 지혜를 다 익히고 천거 받은 터여서 어렵지 않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명곡 오희도는 봉양해야 할 노모가 있는 처지라 세상에 나아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말했다. 주저하던 능양군은 발길을 돌리고 다시한번 오희도를 찾았다. 하지만 명곡은 나아가지 못함을 어렵게 말하며 나주의 박효립을 천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효립은 궁궐의 금호문을 지키게 되고 거사 날 금호문을 열어줌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한 쿠테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폭군이라 지칭되는 광해군이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멸되어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힘을 구축하는 후금을 보며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그는 물러나고 인조가 등극하게 된 것이다.

 왕이 된 능양군 인조는 천하를 주유하며 만난 지사들을 등용하고자 했으며, 오희도 또한 그렇게 쇄신된 국정에 임하고자 어려운 발걸음으로 조정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이 찾아와 세상과 결별하게 되었다. 은둔지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세상을 만나 맑고 명징한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꿈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이에 그의 아들인 오이정은 그런 아버지의 삶을 기리며 맑고 명징한 물소리가 내리는 도장계곡에 원림을 조성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에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배롱나무꽃으로 명소가 된 명옥헌이다. 명옥헌 이라는 이름은 벼슬아치들이 입은 관복에 장식으로 단 구슬인 패옥이 부딪히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말한다. 바위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그 소리와 닮았다고 해서 울명자에 구슬 옥자를 써서 명옥헌이라고 한 것이다.
 
▲절제를 통해 ‘화무십일홍’을 이겨내다
 
 오희도의 벗이자 송강 정철의 4째 아들인 기암 정홍명은 오희도를 일컬어 난세에는 벌레처럼 웅크리고 세상을 만나니 커다란 봉황새처럼 날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칭했다. 왜 명옥헌에 이런 배롱나무를 심었는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옛적 선비들은 이 나무를 보며 단순한 나무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은 나무가 자라면서 그 표피를 스스로 벗는 성질을 가졌다. 표피를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벗으려는 선비의 수양과 닮았다고 했다. 하니 이 덕스러움을 보고 감상하며 본 받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는 화무십일홍이라고 열흘 이상 피는 꽃이 없는데 이 나무는 백일홍이라 부르듯 100여일을 피워낸다. 다른 나무나 꽃이 단 며칠을 위해 온갖 힘을 다해서 피워내고 소멸되지만 배롱나무는 자기 절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꽃을 피워내며 8월에서 10월까지 계속 피워내는 것이다. 이 모습에서 절제와 수양을 아는 나무라 하여 존중했던 것이다. 나무의 겉 부분이 대단히 부드럽고 매끈해서 원숭이도 이 나무에서 미끄러진다고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고도 하고, 세 번 피었다 지면 쌀밥을 먹는다 해서 쌀밥나무라고 부르며, 둥치에서 간지럼을 태우면 그 끝이 연신 흔들거린다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근 300살에 가까운 이런 나무 30여그루와 소나무가 두 개의 연못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 곳이 명옥헌이다.

 한 여름 불볕같은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경상도에서 서울에서 충청도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배롱꽃 천지인 명옥헌을 담으려는 땀방울을 보고 있으면 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에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 말고 정자의 왼편에 삼고(三顧)라고 쓰여진 편액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앞서 얘기한 능양군이 반정을 위해 오희도를 찾았던 일을 기억하고자 우암 송시열이 쓴 글이다. 우암의 글은 위쪽의 상지 연못 옆 계곡 바위면에도 있다. 명옥헌 계축이라는 글을 바위에 새겨 넣은 것이 있다. 그리고 정자의 뒤편에서 보면 정자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배롱숲이 일체로 보여지고, 그리고 사면에는 조그마한 빗돌이 있다. 도장사 유허비라고 써 있는데 옛적에 이곳에 도장사라고 하는 사원 있었다. 명곡오희도를 비롯해 소쇄공 양산보 등을 배향하던 곳이 었음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대원군의 훼철로 사라진 것이다. 가장 붉어진 명옥헌에 가거들랑 이런 역사적인 기억들도 한번 더듬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온 천지가 붉어지는 여름, 그 여름에 가장 붉은 꽃을 피워올리는 배롱나무꽃을 보면서 나는 남도인의 조국과 백성을 위한 마음이 저 나무를 길가며, 사찰이며, 서원이며, 누정 곳곳에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전고필 <대인예술시장 감독,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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