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께 코스를 짜라고 했더니…

 관광을 전공한 탓에 모든 여행의 코스와 숙박과 이동 전반은 내 몫으로 겪어온 지 30여 년째이다. 이번 가족여행에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중학교 2학년인 딸에게 코스를 짜라고 했다. 한 살 터울인 아들과 원하는 코스를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여정에 올랐다. 아이들의 소망은 간결했다. 아빠의 차를 타고 제주를 도는 것이 첫 번째였지만 도선료가 편도 20만 원의 넘어 그냥 포기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향한 것이다. 나란히 앉은 4명의 식구들 두어 달 전부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아들내미는 기내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당연히 창가는 그녀석의 것이었다. 비록 날개 쪽이어서 시원스레 일망무제의 바다와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공군 비행장인 송정공항에서부터 철컥 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모른 척 짐짓 있었는데 승무원이 자상하게 이야기한다. 이곳은 군사시설이므로 촬영이 금지 되어 있다고, 남북의 관계가 평화 모드로 움직인다해도 현실은 엄혹한 것이라는 것을 아이는 알까 싶어지며 카메라를 끄라고 했다.

 구름을 뚫고 나는 비행기에서 아이는 묻는다. 이번이 본인의 생애에서 세 번째 아니냐고. 생각해 보니 그러했다. 외갓집 식구들과 왔던 기억이 있고, 그리고 고모와 배를 타고 왔었고, 이제 중학생이 되어 왔으니 맞는 얘기다. 해서 마음에 남아 있는 관광지가 있냐고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간의 여행이 헛된 것은 아닐 터인데 답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싶어진다. 여행은 어차피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인 걸.
 
▲아이들에게 핫플 AR, VR체험관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준비한 렌터카를 타고 아이들이 엄선한 코스를 찾아간다. 한라수목원 테마파크가 첫 번째다. 왜 거기 가야하냐고 물으니 조형물과 야간 경관이 예뻐서란다. ‘우리는 낮에 가는데 야간 경관은 보지 못할 터인데’라고 하니 그래도 ‘핫플’이니 가자고 한다. 수목원에 들어서니 AR, VR체험관이 눈에 들어온다. 참새들의 방앗간에 온 것이다. 엄마 아빠는 대기실에 ‘우두커니’로 만들고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는다. 30여 분 정도 되니 슬그머니 엉덩이가 들썩인다. 지난해에 돌아보았던 각종의 조형시설을 만난다. 에펠탑이 있고 초승달도 있고 석상과 하르방이 있으며 나무에는 칭칭 동여맨 전구들이 유리의 파편처럼 나무를 옥죄고 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체험공간에 가니 아이들이 나온다. 한 겨울에 아이스체험실까지 다녀온 아이와 함께 이번에는 점심 먹을 곳을 찾는다. 흑돼지를 먹자는 말에 몇 해 전 1인분에 3만원 가까이 하던 맛집에서 맛없이 돈만 쓴 아픈 기억이 났지만, 이번 여행에 나의 존재는 지우기로 한 이상 찾아 헤맸다. 맛집만 찾다가 한 시간을 보내고 결국 대충 먹기로 하고, 점심시간을 훨씬 지난 시간에 숟가락을 들었다.

 허기를 면하고 다음 코스는 김녕의 미로공원으로 향했다. 만장굴로 가는 길섶의 미로공원도 한 번 찾았었던 곳이다. 울울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종을 울리는 곳을 찾아가는, 나름대로의 탐험이 즐거운 그곳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1만 원을 걸었다. 먼저 종을 울리는 사람이 갖기로 한 것이다. 헤매고 다시 돌아서다 만난 고양이 앞에서 한눈을 팔던 아들내미가 누나에게 졌다. 누나는 지난 연말 이원규 시인댁에 갔다가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어 얼씬도 안하고 길만 찾았기 때문이었다. 목표지점에 골인하고 돌아와 다음 코스를 향하려 하는데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 아들내미가 움쩍 달싹 안하고 고양이와 노는 탓이었다.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집에 고양이를 들이자는 이야기만 안하면 되는 것이니.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를 향한다. 월정리 해변이 핫플이니 그곳의 카페가 목적지로 정해져 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한 제주 허 씨 일행은 월정리와 세화 근처로 도착했다. 맞춤한 카페를 찾다가 불현 듯 민물이 콸콸 쏟아지는 해변에서 기러기와 갈매기들이 집단으로 몰려있는 모습을 보았다. 차를 멈추고 이들의 날갯짓에 카메라를 맞췄다. 아름다운 비행도,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으로 흩어지는 모습도, 먹이를 찾아 자맥질하는 모습까지도 천천히 감상했다. 그리고 여행은 이런 낯선 것들, 예기치 않은 해프닝과 만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부자지간에 한 시간 가량을 카메라를 들고 서성거렸다.

 
▲성화에 못이겨 볼링 3게임
 
 숙소는 서귀포, 우리는 서귀포의 올래시장으로 갔다. 저렴한데다 유행하는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에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곳에서 고등어회와 방어회와 낙지를 시켜 먹었다. 고등어 한 마리가 1만5000원이면 제주시의 그 유명한 속초식당이 3만 원인 것에 비해 절반 가격인데, 차마 한 마리 외에는 더 시키지 못했다. 아이들이 낙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잠시 내가 속없다 싶었지만 깨끗하게 포기하니 미련은 없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볼링을 하자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세 게임나 뛰었다. 노곤한 몸을 끌었지만 참 기쁜 시간이었다. 이렇게 함께 여행을 한 것이 몇 년 만의 일인지 자못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시간이었다.

 숙소는 호텔방이었다. 네 명이 한방에서 자고 아침 조식을 먹으려는데 아들이 꿈쩍하지 않는다. 고열이었다. 미리 준비한 약으로 처방을 하고 이번에도 제주의 동쪽을 향해 움직였다. 제주 허브 동산과 위미의 동백 군락지를 만나는 여정이었다. 먼저 위미 마을로 갔다. 아이의 목표는 동백동산이라는 인위적인 정원이었지만 우리는 동산 안에 들어서지 않았다. 이국적인 동백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음에도 낯설어 하고 진짜 동백을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동백꽃만 보면 이원규 시인의 동백꽃을 줍다 라는 시만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차에 아들을 둔채 위미 마을의 안으로 들어섰다. 동백은 아직 덜 피어있다. 한 아낙이 밭 주위의 바람과 모래를 막기 위해 씨앗을 심어 큰 울을 이루고 있는 위미의 동백은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런 동백담길을 걷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우리 지역으로 치면 동복의 연둔리 숲쟁이와 같은 풍광이었다.

 위미를 나와 이제는 점심을 먹으로 간다. 표선 쪽으로 향하니 한적인 마을의 식당이 보여 그곳에 차를 멈췄다. 흑돼지가 1인분에 1만8000원이다. 3인분을 시켜서 맛있게 먹고, 다음 코스인 허브동산을 찾았다. 방향식물인 허브가 지천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이곳저곳의 사진 스팟을 찾는 아이들이지만 힘이 없다. 막내가 아픈 탓이다. 여행 중 한사람이라도 아프면 모두가 힘들어지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터라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제 여행을 중단하자고 했다. 안덕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리조텔이라는 곳에서 이제 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슬포 쪽으로 향했다. 맞춤한 식당이 없고 어지간한 곳은 다 불이 꺼져 있어 안타깝게 또 길을 헤맸다. 그러다 또 마을식당을 찾았다.

 횟집이지만 다양한 음식이 차려지는 곳이었다. 회국수를 시켜먹고, 숙소로 돌아오며 행여나 아들내미가 좋아질까봐 밤에는 별사진을 찍자고 했다.

 
▲가족끼리 이런 여행이 몇년만인지
 
 하늘도 조금 맑아진 것 같으니 오늘은 분명 좋은 장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하면서. 하지만 아들의 몸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자면서 틈나는 데로 밖에 나가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좋은 사진은 기대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불빛이 내 카메라로만 덤벼드는 느낌이었다. 한적했던 제주도의 옛 시절은 사라졌다. 온통 불빛 천지에 차량 천지의 제주도가 되어 버린 것을 알면서도 나만은 한적하길 바랐던 욕심은 허망했다.

 설쳐버린 잠이 혼곤한 아침. 아이는 더욱 열이 올라 병원으로 직행했다. 38.5도. 독감일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약을 처방 받고, 그럼에도 딸이 원하는 승마체험은 뺄 수 없었다. 더마파크라는 곳으로 가서 두 시간을 기다려 승마체험을 했다. 몽고인들이 마부로 일하는 아이러니들 앞에서 아이들은 갸우뚱 거린다. 가장 말을 잘 다루는 민족이니 그렇다고 하면서 전에 대만에서 필리핀 친구들이 호텔에서 일한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협재해수욕장의 산호 물결을 보면 좀 기분이 풀릴까 싶어 들려서 산책을 하고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천혜향과 한라봉과 갈치와 고등어를 구매하는 식구들을 보며 숨죽이고 다닌 여행도 이만하면 성공했을까 자문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귀한 시간 좀 더 의미 있게 다닐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 아닌가 싶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지금도 앓고 있는 아이를 보며 괜히 떠난 것 아닌가 싶어지고 하고, 한편으로는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아쉽지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모처럼 만의 가족여행은 아이들의 성장통과 나의 내적 성장통과 함께 마쳤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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