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으로 만든 솟대 앞에서

▲ 고궁박물원의 박산향로.
 일국의 국립박물관이 갖춘 격은 무엇일까?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세계 5대 박물관에 속하는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을 찾는다. 내 나라의 박물관은 잘 찾지 않아도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 것이 이즈음의 여행 패턴이라면, 우리에게 고궁박물원은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싶어진다.

 대륙을 떠나 섬으로 피난하는 장제스는 국민을 택하는 대신에 중국의 진귀한 문화재를 택했다. 마오쩌뚱은 폭격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가 수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사한 일이 존재했다. 오대산의 상원사가 그러했다. 6·25동란이 나자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상원사에 좌정한 한암스님에게 적이 이 절을 거점화 할 수 있으니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젊은 장교와 군인들이 찾아왔다. 이에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차려입고 법당에 좌정하며 불을 지르라고 했다. 하니 장교는 왜 이러시냐고 화들짝 놀라 여쭈니, 그대가 상부의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면 나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야 하니 여기 적멸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 군인들은 법당의 문짝만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각각의 문화재들이 지닌 이야기는 강변의 모래알 같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 문화유산 답사의 열풍을 간직한 것도 우리의 최근 모습이었다. 내 자신 또한 똑같은 문화재여도 보는 각도와 시간, 날씨, 계절, 함께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간 곳을 또 찾아가곤 한다. 이맘때쯤이면 백양사의 고불매를 만나야 하고, 벚꽃에 쌓인 경주의 고분을 찾는 것이 순서다.
 
▲국립고궁박물관 문화재 70만 점
 
 하여튼 고궁박물원은 소장한 문화재만도 70만 점이 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소장품을 전부 보는 것은 불가하고, 진열된 작품 안에서 충족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코 소홀히 볼 작품은 없다. 나는 이곳 박물관에 가면 옥으로 만든 자그마한 솟대에 늘 관심을 기울인다. 동양 사상에서 오리라는 존재감은 어디까지일까? 서양의 상징적인 새가 용맹한 독수리라면, 동양은 순하디 순하면서도 물과 뭍과 하늘을 섭렵하는 오리를 모셔왔다. 우리네 민족은 이 새를 마을 어귀에 세우면서 인간의 소망이 하늘에 닿기를 기원했고, 뒷꽁지로 물을 가져와 마을이 화재가 드는 것을 예방하고, 부리에 물고기나 벼의 낟가리를 물고 풍어와 풍농을 기원했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은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을 화줏대에 담은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삼한시대에 솟대가 세워진 곳은 소도라고 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는데 치외법권 지대로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런 솟대이다 보니 나로선 옥으로 만든 북방의 이 솟대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배추 속으로 메뚜기가 들어가는 영상.

 한편 우리 일행들은 서로 나누어서 다녔다. 하지만 모두 한곳에 모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 드넓은 전시장에서 한데 모아지게 만든 힘은 바로 취옥배추였다. 명물중의 명물이라고 저마다 아우성인지라 우리도 슬쩍 그 보물에 관심이 모아진 것이다. 하지만 배추는 출장 중이었다. 대신에 취옥배추의 탄생과정과 그 안에 담긴 상징성을 설명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하얀색의 옥과 푸른색의 옥 부분을 본 장인은 순결의 상징인 백색과 청색에 번식의 상징과 같은 여치와 메뚜기를 넣어 자손의 번성함을 기원한 조각품을 만들어 낸 것이 영상 속에 담겨 있었다. 진품이야 지난 번 여행 때 보았으니, 이번에는 그 뜻을 알게 된 것만도 만족스러웠다. 웅장하고 기품 있는 전시품과 우리 역사와 닿아있는 다양한 문화재를 보면서 모든 것들이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사용의 솥이 그러했고, 금동향로가 그러했고, 회화와 불적까지 세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관람했다. 대륙의 문화가 스케일이라면 우리 문화는 섬세함과 상징적 은유가 내포된 은근함이 강점이라는 것을 비교해 본 시간이었다.
 
중정기념당의 위병.

▲장제스 중정기념당 마뜩찮음
 
 규모와 소장품에 압도당하는 시간을 보내고 이제 별로 가보고 싶지 않지만 대만 여행의 필수 코스인 중정기념당으로 간다.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이곳은 매 시간 위병들의 근무교대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90년대 초반부터 경험했던 터이라 근무교대 보다는 우선 전시관에 관심을 가졌다. 장제스의 활동상과 그가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된 공간을 둘러보며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영웅화 혹은 신격화하려는 일단의 추종세력과 그것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의 사이에서 줄곧 희생당하는 민중들의 비애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 싱가포르의 이등휘, 대만의 장개석, 한국의 박정희는 동시대 철권통치의 대표주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독재정권 치하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은 투옥을 당하고, 인권은 유린되고, 부의 편중 현상은 심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근대화, 문명화, 자기 나라식 민주주의 등으로 포장하며 권력을 유지해온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역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광객들은 무심하게 그가 남긴 유품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정시가 되어 교대식장으로 올라간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각잡힌 군복에 번쩍이는 철모와 기름 반지르한 총을 들고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에는 군인들의 무력적인 힘이 잔뜩 베어 있다. 멋져 보이지만 저 기계화된 몸짓에 내포된 정신까지 들춰보면 안타까움이 더 앞선다. 시멘트의 우람함을 가져와 지어진 건물의 외면에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증명 사진을 찍고 우리는 약간의 보슬비를 맞으며 국립 음악원과 희극원 건물이 옹위하고 있는 기념당 밖으로 나왔다. 예술이 국가 보다는 위정자를 복무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란 믿음을 가지면서.

 이번에는 타이빼이 아트빌리지가 목적지이다. 본래 타이빼이 시청이었던 것을 시청 국장의 제안에 의해 예술가들의 국제적인 교류중심인 레지던스형 아트센터로 리모델링되었다. 10여 명의 내 외국인 작가들이 활동을 하는 이곳은 단지 자신의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와 대만 사회와 함께 나누고 배우는 공간임을 익히 아는 터이다. 담양의 해동주조장을 복합문화공간이자 레지던스 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방법을 배우고자 온 일행들은 그 내면을 이미 이해했다. 공무원의 열린 사고가 국제적인 예술도시를 만드는데 얼마나 큰 공헌을 하는지를 관광, 축제, 행사 등을 통해 경험했던 터이니 말이다.

타이빼이 아트빌리지.
 
▲게스트하우스에서 뜻밖의 인연
 
 이제 우리의 발걸음은 보장암 숙소를 향한다. 게스트 하우스인 이곳은 원주민의 낡은 건물, 옹벽에 기대인 건물을 3개의 층으로 하여 숙소와 식당, 회의룸을 가진 곳이다. 운 좋게 우리는 다른 영화제작팀이 전부 예약한 가운데 잠시 비워진 공간에 유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틀씩이나 예약이 가능했다. 첫 번 호텔에 비해 3배나 가까운 저렴한 가격에 빈티지 하면서도 토속적 내음이 깊이 베인 곳이라서 만족도가 높았다.

스린야시장의 매대 경험.

 여장을 풀고 이번에는 스린 야시장을 간다. 동남아의 밤문화를 우리는 결코 흉내 내기 어렵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이야기도 나눠본다. 띄엄띄엄 한국어를 구사하는 상인에게서 고국의 내음도 느껴본다. 소스를 쓰는 것을 보면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안다는 상인도 있었고, 얼른 돈을 벌고 싶어 장사에 나섰다는 젊은이도 있었다. 제주의 동문시장과 유사했지만 동문 시장에는 돈 냄새만 나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열정과 전문성이 감지되었다. 사대적 사고가 아니라, 무언가의 결핍이 동문시장에서 보인 것이었다.

 반면 내가 있었던 대인시장과 비교하면 대인시장은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강한 것이 흠이라 느껴졌다. 상인분들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든 자발성이 대인시장의 결함, 이것을 채워주는 예술가와 프로젝트팀 이라면, 스린야시장은 정열과 더불어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 어떤 리듬과 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뭐랄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 일종의 아우라라고 해야 할지. 장장 세 시간의 시장탐방을 마치고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의 1박도 모두를 들뜨게 했나 싶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는 뜻밖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영화 스텝들이 주방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이국인이라고 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면 인사를 하게 되고, 무언가 어설프면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보장암예술촌을 배경삼아 종일 지친 스텝들은 냉장고에 맥주를 가득 채워 두었고, 우리는 그 맥주가 탐이 났다. 그래서 일행 중 한분이 잊었던 중국어를 끄집어냈다. ‘맥주 좀 빌려주세요’라는 말씀에 흔쾌히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반찬에 김치가 있음을 보고 자신도 김치를 만들었다고 김치 맛을 권한다. 맛이 없지만 우리의 음식이 여기까지 와 있음에 맛있다고 칭찬하니 우리 것을 달라 한다. 말문이 트인 일행은 망설임 없이 김치와 심지어 고추장까지 주고 만다. 이제 잠은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기륭의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촬영을 하러 왔으니 우리에게 방문해 달라고 하다. 기륭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서로 한잔 술을 권커니 하면서 깊어지는 타이뻬이의 밤이었다. 정말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바꾼 것이 신의 한 수 같은 밤이었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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