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채트원의 ‘파타고니아’ 방식 여행기

▲ 대전역.
 광주와 대전은 이제 멀어져 버렸다. 예전의 철마는 반드시 서대전을 경유하여 광주로 왔는데, 빨라진 고속철도는 하루 두 번만 대전에 갈 뿐이다. 그것도 아주 느릿한 길로. 그런 대전의 초대를 받아 두 번의 대전길을 갔다. 그 내용을 담아본다.

 문화부의 문화도시 관련 회의를 하고 서교동에서 있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기초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 대한 토론을 잠시 보고 대전에 이르렀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30여 명이 줄을 섰다. 기다리던 택시에 모두들 신속하게 오르니 줄이 삽시간에 줄어든다. 이제 열 명만 지나면 내 차례다. 한데 몹시도 많은 짐을 가진 네 명의 가족이 택시를 탄다. 보따리는 예전 70년대 시골 버스를 타던 시대에 어머니가 챙기던 그런 짐들로 가득한데 그것도 여러 개다. 어머니로 보이는 늙으신 분과 딸내미로 보이는 30대 40대 두 분이 짐을 맡고 네 살배기쯤 보이는 아이는 택시의 주위를 위태롭게 다니고 있다. 무거운 짐을 싣고 있는 두 딸과 이를 어쩔 줄 모르며 도우려는 어머니간에 힘겨운 트렁크 짐넣기가 이어진다. 닫힐 듯 닫히지 않는 트렁크에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짐을 다시 빼고 넣기를 반복하는 사이 택시를 기다는 손님들은 5분여가 지났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 볼멘소리가 나올 것 같아 내심 조바심을 가진 것은 나뿐이었다. 아무도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전의 외가에 가는 네 살의 나 같았던 아이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이야 그리로 가면 안 되지. 하면서 아이 걱정을 해준다. 겨우 짐을 빼곡히 넣은 가족이 차에 오른다. 그들의 언어가 재중 동포의 말씨임을 그때 알았다.
대전역.
 
▲인정마저 감미로운 택시·승객들
 
 그렇게 택시는 떠나고 내 차례가 되어 기사 아저씨에게 예술가의 집으로 행선지를 말하고 숨을 한 순배 돌리고 여쭸다. “아까 그렇게 오래 탑승을 하는데도 손님들이 불만 하나 말하지 않더군요. 심지어 뒤에 있는 택시도 경적 한번 안 울리고 기다려 주데요.” “예. 타려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 말로 모든 상황이 정리 되었다.

 한참을 달리던 택시기사님이 “에고 손님. 예술가의 집, 시민회관 말하셨는데 제가 착각해서 문화회관 쪽으로 왔네요. 500원 어치 잘못 왔으니 계산할 때 내어 드리쥬.” “아. 네.” 그렇게 목적지에 오니 4000원 정도가 나와 현금을 5000원 권을 드렸다. 거스름돈 2000원을 주신다. “아뇨 5000원 다 받으셔요.” “아니 제가 시간도 못 맞추고 잘못 돌아왔는데….” “저 보다 더 걱정하셨잖아요.” 그렇게 택시에서 내려 여러 일들을 시작했다.

 충남도청이 있었던 곳이 이전하면서 이뤄진(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도심공동화에 문화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대전문화재단이 원도심의 문화예술거점공간 지원사업을 벌이며 이에 대한 효과와 향후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현장 탐방이 주된 방문 목적이었다. 사업의 전체 개요를 듣고 이제 한곳씩 방문을 한다. 주로 공연과 관련된 분들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통 타악그룹 굿에 갔다. 군대있을 적 관심과 애정을 가지며 보았던 뿌리깊은나무출판사의 ‘샘이 깊은 물’이라는 월간지에 목원대학교의 노동은 교수라는 분이 우리 음악과 관련한 칼럼을 연재했고 나는 그것을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인 마냥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굿을 운영하는 한기복 선생님은 전통음악에 대한 사랑과 긍지가 가득했다. 지원금을 고스란히 연습실의 방음판에 쏟아 붇고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한 가득이었다. 때론 맞장구를 쳐 주며 그분의 국악사랑 이야기와 제대로 된 장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벌여온 수많은 시행착오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창작소 인터뮤직에서 만난 공연 포스터.
 
▲예술거점공간 지원사업 특화
 
 일본의 어느 현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북을 위해 북에 쓸 소가죽을 제공할 소를 직접 키우고 주문 제작한다는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광주의 신창동 유적에서 나온 2000년 전의 악기로 유추되는 현악기를 결국은 재현해냈던 우리의 기억도 있지만 저 정교하고 치밀한 일본의 전통문화의 계승방식을 직접 만났던 한기복 선생은 아마도 분통의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여러 곳을 방문해야 하는지라 얘기를 맺고 오는 것이 아쉽지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원도심이 공동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옛적 사람을 끌어오던 저력은 아직도 남아있어 술집이나 카페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다음의 행선지는 극단 고도를 찾았다. 낡고 오래된 건물의 공연공간과 화장실과 연습실을 리모델링하고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결연한 의지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국공립 시설이 가진 화려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외장에 비하면 민간이 운영하는 것은 어지간한 자본력과 후원이 없이는 좋은 시설을 완비하기 어렵다. 각각의 장르 예술이 처한 어려움은 2005년 생활친화적 문화공간 조성 사업의 심의를 하면서 겪어 보았던 터인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개선된 바가 없다.

 정부가 생활문화센터를 지원한다고 벌써 130여 개가 조성되었지만 그것은 1996년 출발했던 ‘문화의집’의 오마쥬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화의집’을 다시 생활문화센터로 이름을 바꾼다던지, 지역의 공공 문화시설이나 주민자치센터 같은 곳을 지역문화의 차별성과 상관없이 규격화 하며 지원하는 정도가 현재의 지역문화시설 지원 사업이라고 보여진다.
타악그룹 굿에서 만난 북.

 그런 면에서 대전문화재단이 벌이는 예술거점 공간 지원 사업은 예술단체나 개인이 가진 창의적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특화된 지원 사업이라 볼 수 있었다. 구도심 6곳에 이런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부산의 또따또가라는 사업과도 차별성이 있어 보인다.

 부산은 개인의 창작에 중점을 두면서 커뮤니티의 운영과 아트마켓이나 축제 등에서 공동체성을 발휘한다면 대전은 공간의 공유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색다르게 다가온다. 연습실이 부족하고, 녹음비가 없고, 휴게 공간이 부족한 예술가들을 위해 공간을 가진 이들이나 단체가 공유지를 확보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점에서의 차별성이었다.
극단 세익스피어의 공연장.
 
▲극단 우금치와 관용극장
 
 이번에는 우금치에 간다. 2006년이었던가 한 폐교에서 온 힘을 다하겠다던 다짐이 있었던 단체가 비싼 임대료로 쫓기듯이 나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6억 원이라는 돈을 장만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예전에 교회였던 곳이니 대중의 연희와 강습과 공연의 장소로는 맞춤이었다. 한데 공연단체에 그만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방법은 선후배들의 도움과 펀드레이징이란 방법뿐이었다. 그런 열악함 속에서 선뜻 좋은 후원자들이 나타났다. 대구에서 운수회사를 하시는 이관용이라는 분은 흔쾌히 1억 원을 쾌척했다. 극구 사양하는 우금치 단원들에게 열린 계좌를 통해 1000만 원씩 10회를 보내셨다고 한다. 그 고마움에 그분의 이름을 따서 공연장의 이름을 ‘관용극장’으로 명명하였다.
극단 우금치 후원자들의 이름을 기재한 황금나무.

 사진에 나와 있는 황금나무는 바로 여기에 벽돌 값을 지원하신 분들의 성함이 기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민족극의 현실은 크게 예전과 다르지 않아 지금은 연습공간이나 소규모 공연에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열정이 있되 현실이 따르지 않는 모순은 예술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이분들이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질 기대하며, 다음 공간인 예술전용극장 대전아트시네마로 갔다.

 극장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극장을 운영하는 대표님의 소극장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영화 평론과 비평, 제작과 관련한 교육 공간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정된 지역 인적 자원의 모집이 다소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소규모 커뮤니티라고 하더라도 참여하는 분들의 열정은 대단해서 결코 멈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극단 세익스피어로 갔다. 100여석의 관람석은 말끔했고, 미술전시장, 카페, 분장실, 녹음스튜디오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2020 내년도 대관 상황을 보니 1년 중 비어 있는 날이 30일도 채 안되었다. 공간을 바꾸고 정비하고 눈높이로 마련하니 이런 즐거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심당에서 만난 크리스마스.
 
▲ 미루지 않고 새 길 찾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음악창작소 인터뮤직이었다. 30대의 대표는 자신이 꿈꾸던 일을 벌일 수 있어 너무나 감격하고 있었다. 5층에 달하는 건물을 매입하며 겪었던 고충과 긴장감 따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서 예술인들과 함께 성장할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분에 비해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몫이 된 것 같은 시간이었다.

 150만의 도시, 하지만 서울과 불과 한 시간 거리로 사람과 자원이 모두 서울로 쏠리는 가운데 여기 훈훈한 사람들, 쑥스러워 하지만 결코 내 일을 미루지 않고 현장과 부딪히며 새 길을 내는 사람들과 만나는 여행길이었다.

 돌아오는 길, 대전과 함께하는 성심당에 들려 빵을 사들고 오랜만에 무궁화호를 탔다. 그 훈훈한 여행이 노곤했던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꿈결에 내가 내리는 곳 광주송정이라는 안내를 듣고 잽싸게 내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그곳은 김제였다. 아! 빨리 내려와야 하는데, 담양서점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고필<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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