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알게 된 성적 추락 미스테리



 옛날에는 그랬다. 풋내 나는 김치와 간장 한 종지에 된장국이 전부였던 밥상에 어쩌다 한번 생선이나 육고기로 만든 맛있는 것이 올라오면 아이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하다못해 아버지만 드시던 숭늉그릇에도 아버지가 물리기 전에는 숟가락을 얹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드시다가 몇 숟갈 남긴 숭늉은 오빠에게 넘어갔다가 남동생까지 돌고 나서야 나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숭늉그릇이 나에게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세 살 어렸던 여동생은 구수한 누룽지그릇에 수저 한 번 담가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특히 단맛이 나는 먹거리가 눈에 띄면 남새스럽게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하며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형제자매 중 누군가 감기에 걸려 복용한 다음 플라스틱 숟가락에 남겨놓은 시럽을 맛나게 핥아먹고 돌림으로 모든 형제자매가 감기에 걸리던 게걸스런 유년은 나만의 이야기일까?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아버지의 숭늉그릇이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부모님이 들고 있는 그릇을 빼앗아 가지 않으면 다행이라 해야 할 지경이다. 또한,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한다. 무심코 하는 부모의 어떤 행동이 아이에겐 강한 인상을 주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서 아이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찬물 한 바가지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저 저자거리에서나 오갈법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책임감으로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쉽게 아무 생각 없이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는가?

 

 어른들은 마시면서, 우린 왜 말려요?

 

 밤사이 도둑들 듯 나이가 들어 나도 어른이 되었다. 세상은 많이 달라져 예전처럼 여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마치 범죄처럼 대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만약 지금도 그런 사고를 버리지 못했다면 조선시대에서 온 `꼰대’라고 놀림당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을 작정이다. 물론 나는 지금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내 앞에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자기 부모 흉을 보거나 심지어 욕을 하는 아이들도 자주 보았던 영향이 크다.

 “아, 참 놔! 자기들은 술, 담배 맘대로 하면서 나는 게임도 못하게 해! 막말로 술 담배가 해롭냐? 게임이 해롭냐? 안 그래요 선생님?”

 갑자기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듣고 보니 나도 은근 헷갈린다.

 “야, 얼마나 맛있으면 어른이라고 뻐기며 자기들만 먹고 마시겠냐? 우리가 뺏어 먹을까봐 구라치는 것이 뻔하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데 듣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어울리지 않는 꼰대흉내를 짐짓 내본다.

 “니네들은 나중에 어른 되면 더 맛난 것, 더 좋은 것 원 없이 먹을건데 어른들이 하지 마라는거 조금만 참으면 어디가 덧 나냐?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먹지 말라고 하는 거는 다 이유가 있어. 그러니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말고 아예 관심을 꺼버려라 잉.”

 우이독경이다. 아무리 간곡하게 말해도 내말은 귓전에서 쓸려 나가버리고 되레 질문만 되돌아온다.

 “알았어요. 관심 끌게요. 근데요 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술은 뭔 맛이에요? 왜 괴롭다면서 쓰디쓴 소주를 마셔요? 그리고, 우리 아빠는 나 혼내고 나면 꼭 담배 피우는데 그럼 기분이 좋아져요?”

 아이들 대화에 궁둥이를 들이민 것이 실수였음을 깨닫는 순간 서둘러 마무리 수순으로 들어간다.

 “지금부터 소주, 담배는 금기어다. `19금’이니까 그 나이 들 때까지 근처에 얼쩡대지도 마. 니네 대학가서 나 찾아오면 그때 술도 사주고 담배도 사줄텐게 기둘려. 알았지! 조용! 공부시작!”

 “와아. 쌤. 진짜죠?” 함성으로 어쨌든 토크 마무리! 그런데 상황은 종료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거실장의 양주, 준오를 유혹하다

 

 어떤 형태의 모임이든 아이들이 대 여섯 명 정도가 모이면 그중에는 꼭 대담하고 실천력 왕짱인 아이가 끼어 있기 마련이다. 준오가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그때, 준오는 굳이 서열을 매기면 원래 `넘버 쓰리(3)’급 정도 되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술을 접하면서 `넘버 원’으로 `클래스’가 급상승한 `중딩’이었다. 준오가 사는 동네는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날이 춥고 길이 미끄러운 겨울에는 자전거를 타고 30분 이상 달려야 할 만큼 학교나 학원에서 먼 곳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준오는 친구들보다 최소한 한 시간은 먼저 일어나서 차가운 아침바람을 맞으며 페달을 밟아야 했다. 학원이 끝나는 밤 10시경에 어둠을 뚫고 달려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시험기간에는 귀가 시간이 더 늦어지기 일쑤였다. 3학년이 되어 머리가 굵어진 준오는 시험기간 만큼은 등하교의 고통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친구집에서 비비는 것이었다. 시험기간에는 배짱이 잘 맞는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시험공부도 하고 너무 늦어지면 친구집에서 자기도 했다. 준오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가정의 둘째였다. 당시 위로는 형이 있었고 아래에는 초등학생 여동생이 있었다. 준오는 부모님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착실꾼이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형과 아직 어린 여동생에게 부모의 관심과 손길이 많이 치우쳐 있었다. 학교와 가까운 친구집에서 시험 공부도 하고 우정도 쌓는 일석이조의 외박에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비슷한 사연으로 호기심 많은 열 여섯 살 중딩 네 명의 친구들이 모여 밤을 새우며 공부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물론 네 명 모두 아주 착실하고 얌전하고 수말스럽고 아직도 솜털 보송보송한 귀염둥이 우리네 왕자님들이 분명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아니다. 시험기간에는 특히 그렇다. 경쟁 상대가 내 눈앞에 있다. 같이 놀면 나만 죽 쑬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안심하고 같이 논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운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이게 정답이다. 특히 남학생들이 시험준비를 하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경구다. 영어교과서를 들여다 보다 한 친구가 화장실에 가면 모두 일어나고, 수학 문제를 풀다 목이 마른 다른 친구가 물을 마시러 가면 또, 모두 책을 덮는다. 그런데, 준오는 조금 전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한 잔 들이키는 순간, 이미 정신을 팔리고 말았다. 물을 마시는데 이상하게도 거실장에 멋들어진 모습으로 자리한 양주병이 준오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야, 내가 뭔 맛인지 궁금하지 않아? 어른들이 나를 마시면 기분이 좋대. 너도 마셔보고 싶지?’

 덩달아 사람모양을 한 인삼뿌리가 담겨진 긴 술병도 유혹하는 것 같다.

 

 이 독한 걸 왜? 한 잔 더 마셔보자!

 

 `인삼주는 술이 아니야. 약 이거덩. 너네가 마시면 뇌회전이 두 배로 좋아져서 머리가 팽팽 잘 돌거야. 책만 쳐다봐도 머리에 입력 되버릴 걸.’

 머리를 털어내며 안간힘을 써서 집중하려는 순간, 한 친구가 뿌웅~ 소리를 내며 화생방경보를 울린다. 친구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고 준오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도 밤 10시까지는 그럭저럭 공부에 열중했다. 시작은 창대했다. 모르는 것은 서로 물어보고 시험에 대한 고급정보도 교환하면서 계획대로만 한다면, 다음 주에 시작되는 이번 시험에는 성적이 확 오르겠다는 기대로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지나면서 슬슬 긴장이 풀리고 배도 고프고 입이 심심해졌다. 그래서 승민이가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술병을 발견하자 보물이나 찾은 듯이 자기도 모르게 환호하고 말았다. “야호! 술이다. 양주”

 집주인인 민석이가 난처해한다. 주말인 오늘, 민석이 부모님은 친구들과 밤새워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보고 흐뭇해하며 여행을 떠나서 지금 집안에는 그들밖에 아무도 없다.

 “그건 아빠건디….”

 민석이가 망설이자 곱슬머리 승민이가 바로 받아친다.

 “야, 일단 먹고 보리차 부어놓자, 어차피 너희 아빠가 아끼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는 거잖아.”

 동그란 안경을 낀 연우도 한마디 한다.

 “야, 양주를 우리가 어떻게 마시냐. 웃기지 말어!”

 실실 쪼개는 표정으로 보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마음은 저질러 보자는 쪽이었다. 마침내 병뚜껑이 열렸다. 용감한 승민이가 냅다 병을 따고 어디서 봤는지 얼음을 넣고 한잔씩 부어주자 망설이다 홀짝거리더니 이내 후딱 마셔버린다. 목젖이 타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오만상을 쓰다가 가까스로 치켜든 오징어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도 혓바닥을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헤헤 거리며 숨을 토해낸다.

 `왜? 어른들이 이 독한 술을 죽자고 마셔대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렇다면 마저 한잔 더 마셔보자. 이번에는 눈 찍 감고 원샷이다.’

 이번에는 다들 삼키고 나서 어른들처럼 머리에다 잔을 털어댄다. 민석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며 아껴둔 양주가 절반쯤 비워지자 술판은 끝나고 공부도 끝났다. 다행히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늦게 일어나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겨우 일어난 준오네 패거리는 반쯤 남은 양주병에 보리차를 채워 넣고 장식장 위쪽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얌전히 갖다 놓았다. 당연히 머리가 빠지직거려 공부는 작파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양주에 빠진 날을 보낸 준오는 그 전보다 대담해지고 배짱이 두둑해졌다. 키가 작아 1번인 준오는 덩치가 가장 큰 35번 상진이랑 맞장을 떠도 이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술로 출발한 일탈, 더이상 진행되진 않고

 

 드디어, 7월 기말고사가 닥쳤다. 이번에는 좀 더 대담해졌다. 각자 집에 있는 술을 조금씩 훔쳐 오기로 했다. 안경잡이 연우가 방법을 생각해냈다. 깨끗이 씻어낸 우유곽에 술을 채워오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도 민석이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주말에 집을 비워주셨다. 고맙게도 안주감으로 최고인 맛있는 탕수육도 시켜주셨다. 승민이는 매실주, 연우는 자기 엄마가 즐겨 마시는 와인, 준오는 엄마가 담가둔 포도주를 우유곽에 담아왔다. 우리는 시험 준비를 위해 모였고 학생의 기본은 공부이니 일단 밤 10시까지는 공부에 열중하기로 약속했다. 술시는 10시 이후로 잡았다. 술 마시기는 일종의 특별활동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10시가 되었다. 술은 센 것부터 먹어야 한다고 중간고사 때 입맛만 다셨던 민석이네 인삼주를 시작으로 매실주를 거쳐 담근 포도주를 비우고 마지막으로 와인까지 다 마셔댔다.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다. 네 명 모두 중간고사에 이어 엉망이 되어버렸다. 중학교 성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3학년 1학기이다. 고등학교 배정을 할 때 반영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준오도 인문계고 진학이 위태로웠다. 그래도 준오는 술에 빠져 망친 두 번의 시험을 후회하지 않았다. 영어와 수학을 잘하는 편이어서 인문계 진학을 권유하는 나에게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했다.

 “형이 공부 잘하니까 형은 대학가고 저는 영어·수학은 좋아해도 암기하는 것도 싫어하고 공부 자체가 적성에 맞지 않아요. 빨리 취직해서 돈 벌고 싶어요.”

 부모님과 나의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준오는 결심대로 상위권에 속하는 OO공고 자동차학과에 진학했다. 얼마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그마한 자동차공업사에 취직한 첫 해에 나를 만나러 왔던 준오에게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다 무슨 사연으로 그 때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준오는 양주에 빠진 날의 이야기를 껄껄거리며 들려주었다. 그 날, 같이 술에 빠진 친구들 중 둘은 대학에 갔고 둘은 취업해서 지금도 가장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학원을 하는 동안 가장 미스테리한 것 중의 하나가 준오의 급격한 성적 추락이었다. 지금은 그 일의 결과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이기에 웃으며 이야기를 들으며 등짝을 한 대 갈기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지만 만약, 술에서 출발한 일탈이 어디에 당도할 것인지 깜깜할 당시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나는 까무러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준오네 패거리가 그런 와중에도 술을 정복한 다음에 담배를 찾고 그런 다음에는 또, 무분별하고 비뚤어진 형태의 이성교제까지 나아가지 않은 것이 대견했다.

 “술은 미친 약이여! 미친 약!”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목젖이 타는 듯 강렬함을 남기고 들어갔던 양주 한 방울이 끈끈한 접착제가 되어 네 명의 친구들이 평생 동안 우정을 이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홍은숙 <웃음꽃도서관 소피움 연구원>

일러스트 : 이영섭 <호남대 의상디자인학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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