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지상주의 시대의 우리들
차별보다 자기 비하 주의해야

▲ 영화 ‘핸섬수트’.

 `핸섬 수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타쿠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아 어머니가 했던 방식대로 식당을 운영하려 고군분투합니다. 그는 늘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고, 음식 값도 올리지 않으며, 돈이 없는 손님에게는 무료로 음식을 대접하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요리 실력 또한 뛰어난 타쿠로지만 그는 자존감이 무척 낮습니다. 작은 키와 뚱뚱한 체격 그리고 못생긴 얼굴로 인해 놀림을 받아왔고, 심지어 치한으로 오해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타쿠로 앞에 입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외모로 만들어준다는 핸섬 수트의 영업사원이 나타납니다. 영업사원의 손에 이끌려 핸섬 수트를 입은 타쿠로는 잘생긴 남자로 변신하고 안니라는 이름도 갖게 됩니다. 식당에서는 못생긴 타쿠로로 일하며 놀림 받고, 밖에서는 모델로 활동하는 자존감 높은 안니로 살아가던 주인공은 결국 타쿠로로 살기로 결심하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자존감을 오로지 외모에서만 찾았던 습성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며 더 이상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 타쿠로로 거듭납니다.

 외모지상주의가 유효한 만큼 타쿠로처럼 못생긴 외모로 인해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 현실 속에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타쿠로는 잘생긴 안니로 살아 본 후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못생긴 외모로 인해 주눅 들지 않지만 현실은 타쿠로가 사는 영화와 다릅니다. 외모가 자존감의 전부는 아니지만 외모는 자존감에서 커다란 파이를 차지합니다. 자존감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측면도 있지만 남들의 인정과 칭찬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죠.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균형에서 나옵니다. 눈, 코, 입, 귀의 균형이 잘 맞아야 잘생겼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머리, 어깨, 손, 몸통, 다리의 균형이 잘 맞아야 예쁜 몸매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요지입니다. 또한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은 이성의 외모가 훌륭할수록 자손번식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의 외모를 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남들보다 스스로 더 혹독한 판결

 

 빼어난 외모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입니다. 빼어난 외모만큼 이성을 유혹하는 매력도 드뭅니다. 하지만 타인의 빼어난 외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성숙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타인의 외모를 시기하고 `얼굴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인 것 같습니다. 타인의 빼어난 외모에는 시기가 아닌 인정의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잘생겼으면 잘생겼다고, 예쁘면 예쁘다고 인정해주고 거기에서 멈춰야합니다. `왜 나는 저런 외모를 못 가졌을까?’하고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것이 시기이며, 이는 스스로를 깎아먹는 태도입니다.

 저는 영화 `핸섬 수트’의 감독처럼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외모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외모는 자존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나의 외모는 늘 타인의 판단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타인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더 자주 판단하며, 더 혹독한 판결을 내놓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남들과의 외모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외모지상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외모로 인한 차별 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내 안의 습성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수의 현대인들이 외모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면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격언은 쓰인 그대로보다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의심이 많은 철학자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심 끝에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겠구나!’

 

 생각이 다른 이유, 정신을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의심한다, 즉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41세 되던 해인 1637년에 출판된 책입니다. `방법서설’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의 이성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방법에 대한이야기(소두영, 2016)입니다.

 -탐구자가 스스로 진리 탐구를 계속해 간다면, 그동안 길은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길을 곧게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방법’인 것이다.- 소두영, 2016. `방법서설’을 번역한 소두영 선생의 말처럼 데카르트는 이성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다보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리스어로 `방법(methodos)’은 `본디 더듬어 가는 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양식(良識 : 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이 그것을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에서는 좀처럼 만족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조차도 양식에 대해서만큼은 보통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의 증거가 된다. 즉 잘 판단하여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은 본디 양식 또는 이성(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똑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의견이 저마다 다 다른 것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이성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따라 생각해 가며, 또 생각하는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좋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정신을 잘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마음은 가장 큰 덕행(德行)을 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큰 악행도 저지를 수 있으며, 천천히 걷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곧은길만 걷는다면 달리는 사람이 곧은길에서 벗어날 때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본문 中

 `방법서설’의 첫 단락을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사람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능력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이 능력이 바로 이성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따라 생각하며,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이 다른 이유는 정신을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내 정신이 어떤 점에서나 보통 사람보다 더 완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중략) 내가 금이나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구리나 유리 조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일은 참으로 틀리기 쉽다는 것, 또 친구들의 판단이 듣기 좋은 것일 경우에는 사실상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방법서설’에서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지금까지 지내온 생활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 저마다 판단을 내리게 함으로써 항간에 떠도는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알고, 이것을 나 자신의 교육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수단으로 삼아 지금까지 늘 사용해 온 수단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의도는 각자가 그 이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서 써야 할 방법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방법으로 내가 나의 이성을 인도하려고 애써왔는가를 보여주자는 것뿐이다.- 본문 中

 

 친구들의 좋은 말, 의심해봐야

 

 데카르트는 권위적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신은 남보다 결코 훌륭하지 않고, 자신이 `방법서설’을 쓴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성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왔는지 보여줌으로써 여기에 대해 의견을 듣고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데카르트)이 자신의 이성을 이끌어 온 모습을 보고 저마다 판단을 내리길 원합니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성을 훌륭하게 이끌어갈 방법을 탐구하고 저마다의 방법을 찾아내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방법을 찾아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데카르트는 “친구들의 판단이 듣기 좋은 것일 경우에는 사실상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이 좋은 말을 해주면 의심은커녕 이를 통해 관계가 두터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데카르트의 주장이 오히려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주장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말이란 즉,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말 그대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일뿐,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판가름되지 않은 말입니다. 이렇게 풀이해보니 데카르트의 생각이 조금은 잡힐 듯도 합니다.

 -국가는 얼마 안 되는 법률을 갖고서 그것을 매우 엄격하게 지킬 때 훨씬 잘 다스려지는 것이므로, 나는 논리학을 구성하는 그 숱한 규칙 대신에 비록 한 번이라도 거기서 벗어나지 말자는 확고하고 변치 않을 결심만 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규칙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첫 번째 규칙은, 내가 명백한 증거로써 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참으로 인정하지 말 것. 바꾸어 말해서 주의 깊게 속단과 편견을 피할 것, 그리고 내가 의심할 어떠한 이유도 갖지 않을 만큼 명석하고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내 판단 속에 들여놓지 말 것. 두 번째는, 내가 음미하는 각 문제를 되도록 많이, 그러면서도 그 문제를 가장 잘 풀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세 번째는, 내 사상을 차례대로 이끌어 나갈 것.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말하자면 단계를 밟아서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올라가고, 아울러 본디 앞뒤 순서가 없는 것 사이에까지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마지막으로, 모든 경우에 그 무엇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실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하나하나 들어 살펴보고 전체적으로 모두 훑어볼 것.- 본문 中

 

 말의 주인은 나 아닌, 건네는 상대방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 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논리학은 남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수학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정신을 괴롭히는 혼란스럽고 불명료한 기술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데카르트는 다른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위의 네 가지 방법을 고안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를 읽고 연구하며 이성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말은 생각을 형성하며 생각의 영역에는 이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즉, 언어는 세상을 압축해놓은 기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기호가 아니라 세상을 압축해놓은 기호이기에 언어는 태생이 불완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입니다. 또한, 말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말을 건네는 상대방입니다. 내가 A라는 의미를 담아 말을 건넸어도 상대방은 B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좋은 말이란 진실한 말이 아닌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진위여부에 대한 심각한 고민보다는 상대에게 맞춰주기 위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말을 너무 함부로 사용합니다.

 데카르트의 말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이성이라면 이성을 기르기가 점점 더 어려운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등장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시당초 옳고 그름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비관적인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관적인 관점만 있을 뿐이다’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말입니다. 이래저래 잘 모르겠고, 어렵다는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더 이상 의심이 들지 않을 때까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데카르트에게서 배워야할 점입니다.

김태균<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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