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
내 길을 다른 사람에게 묻고 있진 않는가?

▲ 읽기는 옮기기 혹은 베끼기가 아니라 사유하는 행위다.

 이제 어디를 가나 알리바바의 참깨

 주문 없이도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 세상이다.

 언제나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어디선가 전자감응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 순간

 스르르 몸이 열리고 스르르 우리들은 들어간다.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들어가고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나오고

 그때마다 우리의 손은 조금씩 퇴화되어 간다.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만 봐야하는

 날개 없는 키위새.

 머지않아 우리는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

 - 유하 `자동문 앞에서’

 

 `책을 읽는 법’ 앞에서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산다. 아니, 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 그러다 내가 국민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던 국가로부터 날아온 과속딱지 고지서로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을 벌렁대는 가슴과 함께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법은 약자에게, 권리가 아닌 책임으로 온다. 그래서 소시민인 나는 오늘도 `법 없이 살고 싶다.’

 `법 앞에서’는 일기 길이의 세 페이지짜리 짧은 이야기다. 철학자 들뢰즈는 카프카의 이 우화 한편으로 한 권짜리 방대한 주해서를 썼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고 앞으로 읽어볼 것 같지도 않다. 언젠가부터 평론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어떤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의 권위에 기대는 것이 `독서를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나의 해석이 아닌 그의 해석이 우선 뇌리를 스쳤고, 겨우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평론의 내용에 대한 공감과 반감이 다였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마치 내가 사랑할 여인 혹은 남자를 그 사람을 매우 잘 안다고 자부하는 친구를 통해 사랑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건 변태다. 그렇게 나는 젊은 시절의 독서법을 버렸다.

 두 번째 충격은 책을 읽는 아이들로부터 왔다. 모름지기 시와 소설은 삶과 쌍생아라서, 하나의 사건 혹은 한 인간의 일생을 보고 내리는 사람들의 해석이 무궁무진하듯 텍스트에 대한 해석도 프리즘에 비춰진 빛의 분산처럼 다종다기하다. 고전이란 읽는 자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그 느낌과 해석이 달라지는 책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텍스트가 `빛’이라면 각자의 몸과 마음이 `프리즘’인 셈. 나라는 프리즘을 거쳐 텍스트는 고유한 또 하나의 옷을 입는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을 책 뒤의 `부록’을 통해 해소하는 아이들이 있다. 작가 소개·작품의 시대·인물과 사건에 대한 번역자의 친절한 풀이가 달린 부록, 후기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향한 책일수록 정도가 더하다. 주입식과 수용적 교육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성실하고 꼼꼼한 아이들은 때로 이 별책부록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향해 “책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라며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당당함. 그러나 그 해석은 참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수많은 텍스트들에 대해 그토록 방대한 양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리도 없을 터, 한 권의 텍스트에 한 편의 논문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읽는다는 행위는 정보전달이 아니다. 읽는다는 행위는 나의 이해 혹은 의미 부여여야 하는 것. 남이 한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읽기가 아니라 베끼기 혹은 복사하기다. 해석을 통해 상상력을, 내 사유의 주인이 나라는 당당함을, 인간의 사유란 어느 누구도 억압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달란트이자 최후의 보루임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한 독서가 이래서는 곤란하다. 제멋대로여도 괜찮다. 책이 나를 통과해 다시 태어나게 하자. 그리고 부디 책 뒤에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설명들은 `텍스트란 해석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하나의 장으로서 번역자(그도 독자)가 남기는 선물 정도로만 받아들일 것.

 

 `오직 당신만을 위해 열려있는 법’ 앞에서

 

 카프카의 `법 앞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법(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남자가 문지기에게 다가와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문지기는 거절한다. 남자가 나중에는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문지기는 답한다.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됩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법의 문은 활짝 열려있고 문지기는 문 옆에 서있기에 남자는 몸을 구부리고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문지기는 웃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내가 막는 것에 상관하지 말고 들어가 보시오. 그러나 내게는 위력이 있고, 홀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그 위력은 차츰 커질 게요.”

 문지기가 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남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법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지기에게 애원을 하며 매달렸고, 그를 매수하기 위해 휴대하고 있던 값비싼 물건들도 서슴없이 내놓았다.

 오랜 세월 문지기를 관찰하는 동안 시골남자는 어느덧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문지기가 자신이 법 안으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지기의 털외투에 달린 벼룩을 발견하고는 그 벼룩에게까지 매달려 자신을 도와 문지기의 마음을 돌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자는 아주 작아져버렸다. 남자가 문지기를 불렀을 때 두 사람의 크기가 상당히 달라졌으므로 문지기는 남자에게 깊숙이 몸을 기울여야했다. 남자는 묻는다.

 “모든 사람은 법을 추구합니다”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 오랜 세월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문으로 찾아와서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문지기는 그 사나이의 임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포효하듯 외쳤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소.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제 나는 가서 이 문을 닫아걸겠소.” - 변신(외) 범우사 중에서

 법(法)을 한자로 풀면 물 수(水)변에 갈 거(去). 물은 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이 가듯 사람의 마음과 행동도 이치와 법도에 맞게 막히지 않고 흐르게 하는 것이 곧 `법’이다.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위에서 아래로, 무거운 곳에서 가벼운 곳으로. 그것이 도리이며 순리이다. 나는 인간의 `법’이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불교는 법을 `다르마(dharma)’라고 부른다. 다르마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남긴 가르침으로 참과 허상,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움과 추함 등에 대한 우주의 진리와 사람의 도리를 담은 설법이다. 따라서 다르마란 인간이 간직해야하는 `-다움’의 총체인 것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것은 함무라비법전이나 권리장전, 대한민국헌법 같은 `성문법’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 형식적으로는 법 안으로 들어갈 권리를 갖지만 한평생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법의 테두리를 맴돌다 사라지는 남자. 그는 권력을 위해서만 열리고 작동하는 법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남자가 매체의 힘을 빌려 군중의 시선을 끌고, 문지기가 무섭다고 말했던 세 번째 홀의 문지기와 연줄이라도 만들었다면 법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을까? 남자는 한 문지기만을 바라보며 여러 해를 보냈고 첫 번째 문지기가 법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라고 생각해버린다. 그의 첫 번째 불운한 망각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소. 이 입구는 오직 한 사람 당신을 위한 문이었으니까. 나는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남자의 죽음으로 문은 닫힌다.

 그 문이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면, 법(法)은 처음부터 남자의 것이었다. 그는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다면 문 앞에서 남자가 들어가기를 한사코 막는 문지기는 누구인가? 문지기는 내가 버려야하는 마음속 의심과 의혹, 걱정들이었다. 내가 자격이 있을까라는 자기 의심과 의문, 내 길을 다른 사람에게 묻는 의존에의 습관들이었다. 열반경에는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다.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잊고 손가락만 본다는 의미다. 법이 달이라면 손가락은 문지기, 남자는 자신이 법을 만나러왔다는 사실을 잊고 문지기 옷의 벼룩까지 알게 될 정도로 문지기에게만 매달린다. 목표를 추구하려다 목표 외의 것을 제거하느라 세월을 다 보낸다. 그야말로 견지망월이다.

 

 법의 주체는 다름 아닌 나다

 

 언젠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종교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있는 질문이 있단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이다. `아니다. 고통은 무조건 피해야하는 것이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답하는 사람은 그가 종교를 가졌던 그렇지 않던 비종교적이라는 말이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탄생·성장·사랑·결혼·출산·양육·노화·일과 업….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사람이 평생 거쳐 가야하는 문들이 있고 그 문은 고통과 지복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갖는다. 한발을 내딛는 순간 열리는 앞면이 싱긋 웃고 있다고 뒤까지 웃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들어서는 순간 심장을 소금에 헹구는 고통을 맛본다 해서 나가는 문까지 쓰라리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기보다는 의미를 만들며 어쨌든 자기만의 법(法, dharma)을 향해 가는 것이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종교적이다.

 `종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칸에 기독교라고 적지 못하고 `신을 믿습니다’라고 적었던 사람은 자기만의 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라크전쟁 파병을 앞두고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미국기자의 질문에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던 오바마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추구하고자하는 진리, 법에 다다르는 길은 형식과 외형에 있지 않다. 게다가 그 길은 모든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열린 길이며 따라서 하나뿐인 문이다.

 문지기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내면이 만들어낸 또 다른 남자의 영상이며 환영이었다. 지금 맡고 있는 작은 지위에서 오는 상대적 거만, 만나보지도 못한 문안의 문지기들에 대한 두려움 섞인 허풍은 다름 아닌 남자의 내면이 남자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법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남자의 염원이 절실해질 즈음이면 여지없이 문지기는 고향이며 그 밖의 일들을 물어와 남자의 관심을 법 자체에서 일상으로, 문지기에게로 돌려놓는다. 내면의 소음들에 귀가 열려있는 한 남자는 자신의 법에 이르지 못하리라. 핵심을 흐리기 위해 나 자신이 내게 거는 주문(呪文), 혹은 무수한 빅브라더가 개인에게 거는 주문과 문지기의 질문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세속의 문들은 정말로 쉽게 열리고 저 혼자 스르륵 닫힌다.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유혹하는 그 문들 안에, 그러나 법은 없다.

 그렇게 나의 것이 아니었던, 쉽게 열리기에 들어가 보았던 문들을 기웃거리는 동안 나의 생은 저물고 생과 함께 법에 이르는 단 하나뿐인 문은 닫힌다. 나에게로 가는 빈 중심, 그곳에 곧 법이 있었음에도.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