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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설을 만나다]자크 프레베르 ‘새 잡는 사람의 노래’ & 이규희 ‘뭉크·클레’
마음을 그리다
박혜진
기사 게재일 : 2017-12-04 06:05:02
▲ 뭉크의 ‘태양’.
 그토록 유연하게 날아가는 새
 피처럼 붉고 따뜻한 새
 아주 부드러운 새 비웃는 새
 갑자기 무서워하는 새
 갑자기 머리를 부딪치는 새
 달아나고 싶어 하는 새
 외롭고 미칠 것 같은 새
 노래하고 싶은 새 소리치고 싶은 새
 피처럼 붉고 온기가 있는 새
 그토록 유연하게 날아가는 새
 그건 바로 너의 예쁜 마음
 그토록 단단하고 하얀 너의 가슴에 부딪치면서
 그토록 아주 슬프게 날갯짓하는 너의 마음
 - 자크 프레베르 ‘새 잡는 사람의 노래’
 
▶사랑과 삶과 죽음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국민화가. ‘절규’가 그의 그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절규를 한 번 보고 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왼쪽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사선들로 이루어진 다리위에 한 남자가 자신의 귀를 막고 서있다. 퀭한 눈, 경악하는 입. 그러나 깊은 곳에서 올라온 경악은 입 언저리에서 차갑게 식는다. 그의 표정은 소리 내지 못하는 자의 가위눌림 같은 것. 오랫동안 제 목소리를 삭힌 사람은 밖으로 통(通)하는 소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기능을 다 못한 소리는 안으로 돌아와 비수가 된다. 내면은 억눌린 말들의 감옥, 켜켜이 쌓인 마음들이 웅성거리기에 S자로 휘어버린 그의 몸. 뭉크의 몸. 어쩌면 당신의 몸.

 아는지. 사람은 태어나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손가락 뻗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기억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기억은 음의 정수와 같아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구현되지 않는 윤곽이 있어 그는 날마다 과거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하나를 쌓으면 다음 날 두 장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의 수모를 겪으면서. 소금물에 쓸리는 모래사장처럼 그의 매일은 쌓고 허무는 기억들로 쓰라리리. 에드바르 뭉크는 그렇게 살았다.

 때때로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벌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잦은 슬픈 경험을 한 착한 아이들은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내면의 논리를 만든다. ‘엄마가 나를 벌주는 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야. 나라는 존재가 잘못인거야.’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데려가는 건 내가 잘못됐기 때문이야. 나는 나쁜 존재야.’ 이성이 무르익은 성년이 되어도 어린 시절의 청사진은 세상과 자신을 보는 필터가 되어 앞을 가린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결핵으로 떠나보낸 후, 어린 동생들을 돌보던 누이가 같은 병으로 열여섯 살 뭉크의 곁을 떠났다. 이사를 자주 다녀야했던 가난한 군의관 아버지는 점점 강박적으로 변해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너희들을 하늘에서 지켜보며 슬퍼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일이 늘었으나 눈물은 안으로 흘렀다. 뭉크는 그렇게 살았다.
 
▶태양 오, 솔레미오!
 
 80살까지 그는 살았다. 그림이 그의 가족이어서 한 작품이 팔리면 반드시 같은 작품을 다시 그려 곁에 두었다. 그가 죽었을 때 곁에는 유화 110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4500여 점, 판화 1만8000여 점, 스케치북과 편지 등 엄청난 양의 작품과 자료들이 그와 더불어 침묵하고 있었다. 생전의 유언에 따라 분신이자 자식이었던 작품들은 모두 시에 기증되었다. 오슬로 국립미술관과 뭉크미술관에 있다는 그의 그림들을 생각한다. 아버지를 잃은 그 그림들은 행복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돈에 팔리지 않고 생전에 모여 있던 대로 오순도순, 아버지의 추억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찾는 눈 댕그란 아이들과 가난하여 장학금 없이는 미술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뭉크와 같은 젊은이를 맞이하며.

 태양. 온 누리를 향해 넘치는 햇살! 말년의 뭉크의 그림들은 놀랍다. 빛들이 그림 밖으로 배어나오는 듯한 그림들. 만져질 것 같은 기쁨,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 평온.

 사랑하던 이가 사라진 자리를 모두가 떠난 후에도 오래오래 응시하는 자는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자이다. 삶이 지워진 자리의 공허를 집요하게 지켜보는 자는 끝끝내 삶을 사랑하는 자이다.뭉크는 승리했다. “슬플 때 뭉크의 ‘태양’을 보세요.” 미술임상심리치료를 하는 선생님의 조언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 아이들은 뭉크 그림을 기이하다거나 뒤틀리게 보지 않는다. 신기하게 본다. 그리고 열렬하게. 뭉크의 정직한 인식과 아이들의 열린 상상력은 깊이 통하는 데가 있다. 절규를 보며 “뒤에 걷고 있는 모자 쓴 신사들은 왜 듣지를 못할까요?” 의아해하고 “내가 저 다리위에 있으면 당장 달려갈 텐데.” 아쉬워하고, “나도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있었는데.” 슬쩍 마음을 내비친다. ‘다리위의 소녀들’처럼 아이들에게도 초록과 빨강, 하얀 마음의 시기가 있으리라. 뭉크에게 감정을 투영해 보여주던 그림이 있었듯이 아이들은 글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한다. 그리고 발표하며 서로 깔깔깔 웃었다.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래!” 마치 천하무적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예수처럼.

 ‘그토록 유연하게 날아가는 새. 피처럼 붉고 온기가 있는 새. 아주 부드러운 새.’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시에서 말했던 새는 아이들이다. 사랑이 스며있지 않은 공허한 과제와 미래에 대한 약속과 설교 앞에서 아이들은 웃는다. “치이, 재미없어! 우리 뭉크 보자.” 웃는 새들을 따라 나도 같이 웃었다. 그렇게 뭉크는 아이들의 시선을 거쳐 행복이 되었다. 이제 뭉크는 친구가 아주 많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뭉크의 ‘다리위의 소녀들’.
뭉크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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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소설을 만나다]뭉크의 마음을 이해하는 현준이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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